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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시각각

김오랑과 박정훈, 군인의 명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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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영화 ‘서울의 봄’이 관객 수 9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추세라면 1000만 영화 대열에 안착할 것 같다. 영화는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이 벌어진 아홉 시간을 숨가쁘게 직진한다. 전두광(전두환, 황정민 분)과 이태신(장태완, 정우성 분)의 선악 대결에 집중한 채 복잡다기한 인물과 배경은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래서 많은 관람객에게 이들은 그저 반란에 가담한 무리와 내내 우왕좌왕한 무능 수뇌부, 안타까운 진압군으로 뭉뚱그려진다.

이런 구도 속에서도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 있다. 부하들의 배신으로 고립된 특전사령관 옆을 지키다 전사한 김오랑 중령(당시 소령)이다. 고 김 중령 역을 맡은 정해인 배우는 141분의 상영시간 중 채 5분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교전 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로 꼽히니 가성비로는 갑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신이 암매장됐다가 현충원에 안장된 사연, 뒤늦게 중령으로 추서됐고, 2014년 어렵게 보국훈장이 추서된 사연도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 12일 고인의 모교인 김해 삼성초등학교 옆 작은 공원에서 열린 추모제에는 150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서울의 봄’ 흥행에 김오랑 재조명
채상병 사건 조사한 박정훈 대령
규정대로 일처리, 죄 물을 일일까

고인이 긴박한 상황에서 정해인의 대사처럼 “사령관님 혼자 계시면 적적하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쿨하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구국의 결단을 하거나, 엄청난 무공을 세운 것도 아니다. 그저 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참군인’의 명예를 품기에 손색이 없다.

요즘 해병대에도 비슷하게 이목을 끄는 군인이 있다. 항명과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는 박정훈 대령(전 해병대 수사단장)이다.

발단은 지난 7월 19일 경북 예천에서 집중호우 피해 실종자를 수색하다 채모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숨진 사건이었다. 박 대령은 이 사건의 조사 책임자다.

당시 병사들은 탱크도 버티지 못하는 물살에 구명조끼도 없이 투입됐다. 아무리 상륙작전이라는 위험한 임무가 본업인 해병대라고 해도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예견된 것이었다. 조사 결과 현장 지휘관들의 입수 작업 지시 배후에 ‘무릎 아래까지 들어가 적극 수색하라’는 수뇌부의 질책성 지시가 있었던 흔적이 확보됐다. 박 대령은 해병대 제1사단장을 포함한 8명의 간부를 경찰에 이첩해야 한다는 내용의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를 받은 이종섭 당시 국방장관도 흔쾌히 결재했다.

있는 대로 조사하고 규정 대로 처리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데, 왠지 생경하다. 수많은 군 사망사건을 은폐하고, 지휘관 책임을 축소하기에 바빴던 군 수사기관의 행적과는 결이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차이에서 그의 고난은 시작됐다. 수사권을 가진 경찰에 보고서를 이첩하기 직전 상부로부터 사단장의 혐의를 빼라는 지시가 온다. 박 대령은 부당한 압력으로 보고 그대로 이첩했다. 그러자 국방부 검찰단이 보고서를 회수해 갔고, 박 대령은 보직해임된 뒤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영장은 기각됐지만 군은 그를 재판에 넘겼다.

이후 해병대는 혼란의 연속이다. 박 대령은 최고위층 외압을 주장한다. 그의 입대 동기와 해병전우회까지 나서 공정한 처리를 요구하고 있다. 군 당국이 보고서에서 애써 뺀 사단장은 결국 경찰에 의해 입건됐다. 사단장은 현장 지휘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진술서를 법원에 냈다. 그 부하는 명예훼손과 직권남용으로 사단장을 고소했다. 당나라 군대가 따로 없다. 그사이 채 상병 사망의 책임 문제는 물속 깊이 가라앉아 버렸다.

박 대령이든, 사단장이든 유무죄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저 주어진 임무를 규정대로 수행하려는 박 대령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처벌까지 하려는 군 당국의 처사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이때다 싶어 박 대령 영입설을 흘리는 야당도 얄팍할 따름이다. 그가 군인으로서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놔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