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9년 만에 택배가 왔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사랑만이 그러할까. 실은 사물만 봐도 그러하다. 열렬하게 환호하다가 당연하게 만끽하다가 심드렁히 지루해하는, 우리가 ‘변심’을 이야기할 때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하면 말이다. 이리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새해 새 목표가 정해진 건가 ‘뚝심’이라 쓰고 보니 웬만하면 약한 척했고 쉽게 주저앉아버렸고 자주 감당할 재간이 없다고 두 손 놓아버린 올해의 이런저런 사정 앞에 나의 면면이 선명하다. 속속들이 내 문제는 내가 가장 잘 아는데 요목조목 고칠 내 속내라면 내가 명의인 것도 맞는데 그렇지, 문제는 미루는 게 아니라 푸는 거 맞지.

생활의 발견. [일러스트=김지윤]

생활의 발견. [일러스트=김지윤]

엊그제 저녁 늦은 참에 친애하는 화가 선생님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2014년 2월 19일 내가 한 시인에게 사인해서 보낸 산문집이 사진 속 거기 들려 있었다. “선생님 제가 소방 점검으로 소화전을 열었다가 이 책이 있는 걸 발견했어요. 택배에 적힌 주소는 이미 풍화되어 안 보이는데 선생님이 보냈던 분에게 제가 대신 보내드리고 싶어요.” 자그마치 9년 전 택배 봉투가 테이핑이 된 그대로 다음 사진 속에 따라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9년 전 살다 이사를 나간 집에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2년 전 이사를 들어가 살 수는 있었겠으나 소화전을 청소하려 열어보는 손과 봉투를 전하고자 뜯어보는 다정한 호기심이 아니었다면 우리 셋을 한데 묶는 근 9년 만의 택배는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지 못했을 터.

모르는 사이였다가 하루아침에 아는 사이가 되어버린 시인과 화가는 용케도 86년 호랑이띠 동갑내기였다. “이 범상치 않은 인연을 누가 믿겠어요. 우편물이 이어준 사이니까 두 분 주고받는 필담으로 책 한 권 기획해보면 어떨는지.” “지금 당장이요?” “이렇게 갑자기요?” 뚝심을 가능하게 하는 단단한 생각인지 고심의 여지를 재고할 틈도 없이 나는 그만 즉흥의 탬버린을 또다시 흔들어버렸다. 즉흥의 대명사인 나여, 사람 참 쉽게 안 바뀌는 거? 그건 진짜 맞지.

김민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