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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한국판 ‘잃어버린 30년’의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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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경제에디터

김동호 경제에디터

한국 경제가 암울하다. 증권사와 유통업계를 비롯해 곳곳에서 인원 감축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조차 신규 임원의 차량 배기량을 낮추고 고문의 임기를 단축한다. 세계경제를 짓눌렀던 고금리가 방향을 트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 인하를 예고했지만 당분간 중금리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내년 경제도 한 치 앞이 안 보인다는 얘기다.

경제는 원래 부침이 심하다. 기술 혁신, 전쟁, 재고 증가 등에 크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일반적 경기 변동과는 다른 특수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바로 저성장의 늪이다. 이제 1%대, 잘해야 2%대 성장률을 바라보는 건 눈앞의 현실이다. 이 수치 너머 우리를 기다리는 건 미증유의 축소지향적 악순환이다. 기업 매출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근로자 임금이 안 오르고, 골목길 자영업자의 장사가 어려워지면서다. 저성장 기조를 부채질하는 절멸 수준의 저출생은 더 악화할 수 있다. 경제가 위축될수록 결혼과 출산 여건은 더 악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률 1% 탈출 위한 비상 상황
정부 부처에 규제혁신부 만들고
리쇼어링으로 내수 키워야 극복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그림자까지 어른거리고 있다. 일본은 1990년을 정점으로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지난 30년 한·중·일 국내총생산(GDP) 규모 변화를 보면 극명해진다. 1992년 한국이 1이었다면 중국 1.1배, 일본 11배였다. 지금은 한국이 1이라면 일본 2.5배, 중국 11배가 됐다. 그래도 일본이니까 이만큼 버티고 있다. 핵과 미사일로 상시 위협하는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처럼 초저출산 위기에 빠지지도 않았다. 저성장에 시달려 왔지만 여전히 세계 3위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리며 선진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은 얘기가 달라진다.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위기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저성장은 재정 악화를 가속하게 한다. 복지 비용은 물론 국방비조차 흔들리게 된다. 최근 뉴욕타임스에서 ‘한국이 소멸하고 있다’고 경보음을 울린 건 인구 감소에 초점이 맞춰졌다. 인구가 줄면 북한이 다시 남침할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그 방아쇠는 인구 감소에 앞서 국방비 부족이 결정적 원인이 될 수 있다.

탈출구는 누구나 알고 있다. 우선 외국인 이민을 더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청년이 선호하는 첨단 제조업과 금융을 비롯한 고부가 서비스업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경제활동에 활력이 살아나면서 청년이 취업하고 결혼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인구가 늘어야 경제 규모도 커지면서 성장동력이 회복된다.

정부 정책도 이런 방향을 뒷받침해야 한다.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규제를 혁신하고 해외에 나간 국내 기업의 리쇼어링을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정부가 들어와도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규제를 혁신하라고 하면 공무원들이 대통령에게 멋들어지게 보고부터 한다. 그런 다음 생기는 것은 고위 관료의 일자리와 추가된 레드 테이프다.

대통령 소속 규제개혁위원회의 역할은 더 강화해야 한다. 이 조직의 구성을 더욱 민간 중심으로 만들고 대통령이 직접 힘을 실어줘야 한다. 여기에 더해 정부 부처에 규제혁신부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 공무원이 틀어쥐고 있는 부서 이기주의와 칸막이식 규제를 고르디우스의 매듭 풀 듯 대담하게 혁파할 정부 책임자가 필요하다. 일본이 30년간 제자리걸음한 건 혁신 부재의 탓이 크다. 정보기술 혁명에 이어 빅테크 혁신에도 뒤처지면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말았다.

수출로 성장하는 건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만큼 규제 혁신과 리쇼어링은 내수 키우기와도 직결된다. 해외로 나간 제조업을 다시 불러들여야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5000만 인구라는 내수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다. 노동·교육·연금 개혁보다 더 급한 것이 규제 혁신과 리쇼어링이라는 것을 윤석열 정부는 물론 여야 정치권이 빠르게 인식하고 행동에 나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