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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명이 숨죽였다…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편지 읽은 행사 정체[더 하이엔드]

중앙일보

입력

#1905년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타임스지(The Times)에 오페라 극장의 복장 규정에 대한 항의 편지를 썼다. 커다란 흰 새 장식을 머리에 얹고 극장에 온 한 귀부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의 편지로,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그의 작풍이 단지 극이나 소설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님을 얘기해준다.

#1934년 미국의 카피라이터 로버트 피로쉬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 뉴욕에서 할리우드로 이주하면서 영화 배급사 MGM의 임원들에게 일자리를 구하는 편지를 여러 장 쓴다. 후에 영화 ‘배틀 그라운드’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게 될 그의 빛나는 경력의 첫 시작은 “당신과 같은 자리에 앉고 싶다”는 메시지가 담긴 한 통의 편지였다.

지난달 16일(현지시각) 영국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레터스 라이브 2023' 현장.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몽블랑

지난달 16일(현지시각) 영국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레터스 라이브 2023' 현장.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몽블랑

지난달 16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레터스 라이브(LETTERS LIVE) 2023’의 무대에 오른 편지들의 일부다. 117년 전 쓰인 첫 번째 편지를 무대 위로 소환한 이는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였고, 두 번째 편지는 배우 윌 샤프의 목소리로 낭독됐다.

배우가 무대에서 명사들의 편지 읽어

레터스 라이브는 2013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무대에서 편지를 읽는 낭독 행사다. 연극이나 음악 공연이 아닌, 그저 편지를 읽는 다소 싱거울 수 있는 공연이지만 로열 앨버트 홀을 가득 메운 3000여 명의 관중은 길게는 2000년 전 쓰인 과거의 편지들이 낭독되는 순간을 숨죽여 ‘직관’ 했다.

레터스 라이브는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편지 낭독 라이브 행사로 편지 문학에 대한 헌사를 전한다. 사진 몽블랑

레터스 라이브는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편지 낭독 라이브 행사로 편지 문학에 대한 헌사를 전한다. 사진 몽블랑

이날 약 두 시간 동안 소개된 편지는 27여 통. 명사들의 유명 편지만 무대에 오른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북아프리카에서 신호원으로 근무하던 청년이 애인과의 사이에서 주고받은 절절한 연애편지부터, 아버지 장례식을 끝낸 후 장례식장의 부적절한 ‘언사’에 대한 한 소설가의 항의 편지도 등장했다.

12세에 다낭성 난소증후군 진단을 받고 얼굴에 털이 자라는 다모증을 앓아 온 하남 카우르(Harnam Kaur)는 이날 무대에 올라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해 박수를 받았다.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는 하남 카우르. 사진 몽블랑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는 하남 카우르. 사진 몽블랑

온라인 ‘편지 박물관’이 시초

레터스 라이브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배우와 가수, 저널리스트 등 명사들이 무대에 올라 종종 시의성 있는 편지를 낭독해 화제가 돼 왔다. 카피라이터로 일했던 손 어셔가 2009년 ‘레터스 오브 노트(Letters of Note)’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연 것이 레터스 라이브의 시초다. 전자 메일이 아닌 손으로 쓰는 옛날식 편지에 대한 애착이 담긴 사이트로, 가장 처음 올라온 편지는 월트 디즈니가 한 애니메이터 지망생에게 보내는 거절 편지였다.

온라인 편지 박물관은 단행본으로, 뉴스레터로, 라이브 행사로 옮겨졌다. 사진은 단행본 '레터스 오브 노트.' 사진 아마존 홈페이지

온라인 편지 박물관은 단행본으로, 뉴스레터로, 라이브 행사로 옮겨졌다. 사진은 단행본 '레터스 오브 노트.' 사진 아마존 홈페이지

이후 약 1억2000여 명의 편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곳을 방문했고, 이 사이트에 올라온 편지들은뉴스레터로, 단행본으로 옮겨졌다. 2013년 출간된 책 『진귀한 편지 박물관(Letters of Note)』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현재까지 14권의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50차례 공연, 전날 출연자 정해지기도

레터스 라이브는 이 단행본의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출판사 케논게이트가 기획한 일회성 이벤트였다. 출판사 대표이자 레터스 라이브의 기획자 제이미 빙은 “편지는 인간이 관계를 맺는 가장 민주적이고 아름다운 방식 중 하나”라며 “관객들은 편지로 경험해 본 적 없는 시간과 장소로 이동하고, 하나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레터스 라이브는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50번 공연됐고, 약 300명의 공연자가 무대에 올라 수많은 편지를 읽었다.

레터스 라이브의 기획자 제이미 빙은 "편지는 인간이 관계를 맺는 가장 민주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이라고 말했다. 사진 몽블랑

레터스 라이브의 기획자 제이미 빙은 "편지는 인간이 관계를 맺는 가장 민주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이라고 말했다. 사진 몽블랑

16일 열린 레터스 라이브 2023에는 베네딕트 컴버배치, 질리언 앤더슨, 올리비아 콜먼, 미니 드라이버 등이 등장해 청중들 앞에서 특별한 편지를 낭독했다. 관객들은 어떤 공연자가 어떤 편지를 읽을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이들을 맞이한다.

레터스 라이브 2023의 무대에 올라 편지를 낭독하고 있는 배우 올리비아 콜먼. 사진 몽블랑

레터스 라이브 2023의 무대에 올라 편지를 낭독하고 있는 배우 올리비아 콜먼. 사진 몽블랑

제이미 빙에 따르면 가끔 공연 바로 전날 출연자가 결정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대에 오르는 편지는 연출팀이 함께 정하고 각 편지와 맞는 공연자를 짝짓는 식으로 이뤄진다. 10년간 레터스 라이브에는 데이비드 보위, 모하메드 간디, 엘비스 프레슬리, 샬럿 브론테, 체 게바라와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쓴 편지가 등장했다. 제이미 빙은 “관객들이 쇼를 통해 기쁨이나 고통·공감·슬픔·분노·연민을 느꼈으면 한다”며 “결국 인류애가 레터스 라이브의 궁극적 주제”라고 말했다.

레터스 라이브 2023의 무대에 올라 편지를 낭독하고 있는 배우 미니 드라이버. 사진 몽블랑

레터스 라이브 2023의 무대에 올라 편지를 낭독하고 있는 배우 미니 드라이버. 사진 몽블랑

글쓰기 문화의 뿌리 공유, 몽블랑과의 협력

올해 레터스 라이브는 좀 더 특별한 여정을 기록했다.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몽블랑과 1년간 글로벌 스폰서십을 공식 출범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몽블랑은 1906년 잉크가 새지 않는 만년필을 선보이며 필기 문화에 혁명을 일으켰다. 글쓰기 문화에 뿌리를 둔 럭셔리 하우스와 편지의 영향력을 기리는 레터스 라이브의 동행은 썩 잘 어울린다.

빈센트 몬탈리스코 몽블랑 최고 마케팅 책임자는 “몽블랑은 글쓰기 예술을 통해 사람들의 연결 방식을 변화시킨다는 선구적 개념으로 시작된 브랜드”라며 “이번 파트너십을 통해 사람들이 글쓰기에 담긴 힘을 재발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자 중 한 명이자 레터스 라이브 공동 프로듀서인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레터스 라이브는 소통과 표현의 수단으로서 편지의 중요성을 기념해 왔다”며 “몽블랑은 아름다운 필기구를 통해 사람들이 편지로 생각을 나누도록 100년 넘게 장려해 온 브랜드로, 둘의 결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고 찬사를 전했다.

레터스 라이브는 올해부터 럭셔리 브랜드 몽블랑과 글로벌 스폰서십을 1년간 진행한다.

레터스 라이브는 올해부터 럭셔리 브랜드 몽블랑과 글로벌 스폰서십을 1년간 진행한다.

단 몇 초면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시대지만, 진심을 전하고 싶을 때는 여전히 편지를 쓴다. 이날 런던 로열 앨버트 공연장의 객석마다 몽블랑의 엠블럼이 표시된 디자인 엽서가 제공됐다. 참석자들이 엽서에 손편지를 적은 뒤 공연장을 나설 때 넣을 수 있도록 몽블랑 우체통도 마련됐다. 소통의 가장 오래된 수단, 편지의 힘을 새삼 확인했던 행사의 가장 완벽한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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