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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옛방식 되살려, 고소한 콩맛 신세계 연 ‘소쿠리두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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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호 24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할머니는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 조청, 등겨장, 메밀묵, 두부 같은 음식을 혼자서도 뚝딱 해냈다. 1970년대, 어린 장손은 그걸 자주 보고 그 음식을 먹었다. 99세까지 사신 할머니는 아흔두 살 때도 장손이 고향 영주(본향은 의성)에 가면 홍두깨로 밀어 칼국수를 해 주셨다.

순두부를 소쿠리에 담아 굳힌 ‘소쿠리두부’. [사진 이택희]

순두부를 소쿠리에 담아 굳힌 ‘소쿠리두부’. [사진 이택희]

할머니는 끓인 콩물에 간수를 질러 몽글몽글 엉기면 보자기 앉힌 소쿠리에 순두부를 퍼 담아 순물을 빼면서 두부를 굳혔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서 두부 틀이 없었다. 두부를 급히 조금 만들 때는 소쿠리보다 작은 됫박을 썼다. 됫박 속에 보자기 깔고 순두부를 담아 한쪽으로 몰며 순물을 뺐다. 보자기로 감싸 모양을 얼추 다듬은 다음 꺼내서 굳혔다.

글 쓰면서 출판사를 운영하던 장손은 쉰 살이 되던 2013년 8월 두부 전문점을 차렸다. 개업에 앞서 한·중·일 3국의 유명한 두부 집들을 찾아가 맛봤다. 한 달 전부터는 집중해서 실전연습을 했다. 맛이 진하고 부드러운 두부는 반응이 좋아 오래지 않아 명소가 됐다. 한국 두부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들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황금콩밭’ 윤태현(59) 대표 얘기다.

음식점은 명절만 쉬고 휴일 없이 매일 연다. 두부도 당일 만든 것만 상에 올리기 때문에 매일 만든다. 별도 공방에서 16모가 나오는 굳힘 틀로 하루 16~20판을 제조한다. 마지막 한 판은 날마다 제조방법을 다르게 해본다. 더 맛있고 좋은 두부의 조건을 찾는 끊임없는 실험이다. 10년을 그랬으니 조금씩 다른 두부를 3600가지쯤 만들어본 셈이다. 콩은 경북 영주산 특 백태를 쓴다. 20판이면 70㎏쯤 들어간다.

소쿠리에 순두부를 담는 윤태현 대표. [사진 이택희]

소쿠리에 순두부를 담는 윤태현 대표. [사진 이택희]

음식점 열고 1년 뒤 일본 두부를 맛보러 갔다. 『일본경제신문』이 2005년 두부 집 1만3000여 곳 가운데 가장 맛있다고 꼽은 집으로 갔다. 사가현 가라쓰(唐津)시에 있는 ‘가와시마(川島) 두부점’이다. 역사가 220년 넘은 이 집에서 1983년 개발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자루(ざる·소쿠리)두부를 먹었다. 예전 할머니가 소쿠리에 하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다만, 1인용 작은 소쿠리를 쓰는 것은 새로웠다. 두부는 맛있었다. 하지만 뜻밖의 깨달음이 있었다. ‘내 두부가 여기만 못하지 않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황금콩밭에서 소쿠리두부를 할지 말지 9년을 고민했다. 할머니 두부를 되살리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일본 흉내 낸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개업 10주년을 넘기며 지난 10월 직원들과 다시 그곳에 갔다. 직접 먹어보고 자신감을 갖게 하고 싶었다. 그 사이 값은 많이 오르고 맛은 예전만 못했다. 이번에는 ‘내 두부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두부 하나만 놓고 보면 우열이 분명했다. 할머니의 소쿠리두부와 됫박두부를 올해 안에 새 메뉴로 올리겠다는 결심이 섰다.

핵심은 ‘자연 탈수’다. 두부를 굳힐 때 순두부를 틀에 담고 누르는 게 아니라 자연의 힘, 중력으로 순물이 저절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순물이 빠지면서 섞여 나가는 콩의 맛·향·영양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두부는 그만큼 맛있고 향과 영양은 좋아진다.

귀국해서 본격 준비를 시작해 11월 23일 시식회를 하기로 했다. 소식을 듣고 21일 오전 7시 30분에 공방을 찾아갔다. 두부 만드는 전 과정을 참관하고, 바로 만든 두부를 맛봤다. 시식회도 참석했다. 16코스와 3가지 김치로 진행된 갈라 디너 형식의 시식회에는 두부음식이 7가지 나왔다. ①블루베리 한 알 띄운 콩물 ②소쿠리두부 생두부 ③저온 압착 들기름을 곁들인 됫박두부 ④토마토와 올리브유가 들어간 됫박두부 샐러드 ⑤쌀가루에 굴려 튀긴 기존 모두부에 황태 보푸라기 고명 ⑥솔치(말린 정어리 새끼) 육수에 새우젓 간을 해서 끓인 새우완자 모두부 전골 ⑦바닐라 시럽을 곁들인 두부 푸딩 등이다.

1인분으로 담아 내온 두부 푸딩. [사진 이택희]

1인분으로 담아 내온 두부 푸딩. [사진 이택희]

콩물은 이름처럼 콩을 녹여 물로 만든 듯한 맛이다. 고소하고 달금하면서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출렁거린다. 블루베리 한 알이 중간에 툭 터지며 미각의 긴장을 추스른다. 생두부는 자타가 인정하는 이 집 대표음식이다. 만든 사람은 자부심 있고, 먹은 사람은 맛있다고 평한다. 그 생두부를 탈수와 굳히는 방식을 다르게 해서 만든 새로운 두부가 처음 손님상에 나왔다. 표면은 얼핏 콩물의 고운 알갱이가 덜 엉긴 듯하다. 일반 두부보다 물기를 많이 머금은 것도 보인다. 아무 양념 없이 날로 먹었다. 고소하면서 좋은 콩의 단맛과 향이 가득하다. 부드러움은 기존 생두부와 결이 다르다. 쌀뜨물을 많이 섞은 달걀찜처럼 부들눅진하다. 질감은 보기보다 차지고 탄력 있고 매끈하다. 경험하지 못한 ‘두부의 신세계’라 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다음에는 됫박두부에 저온압착 들기름을 둘러 맛봤다. 색조가 다른 두 가지 고소함이 입안에서 다툰다. 잠시 우물거리면 두부 갈피로 들기름이 섞이면서 소용돌이치다가 경쟁을 넘어 화합의 고소함으로 변한다. 원효 대사가 설파한 화쟁(和諍)이 입안에서 이뤄진 듯하다. 올리브기름과 토마토를 넣은 됫박두부 샐러드는 올리브 향이 두부의 고소함을 장식해 화사한 맛이다. 달금 새금 아삭한 토마토는 두부의 단조로운 녹진함에 맛의 리듬을 불어넣는다. 튀김두부는 완고한 쌀가루 막이 와삭 부서지면서 속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두부가 물컹 입안으로 쏟아진다. 상반된 두 질감이 어우러져 입안에 수묵 산수화를 그린다.

참석자들이 가장 놀란 메뉴는 두부 푸딩이었다. “혼자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시간을 못 맞춰 실패한 음식”이라며 내왔지만, 식탁에서는 여기저기 탄성이 들렸다. 윤 대표의 두부 도전, 다음 발걸음이 기다려지는 광경이었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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