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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로 부활한 전설의 ‘블랙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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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오랜만에 만화잡지를 샀다. 지난달 22일 출간된 ‘주간 소년챔피언’ 52호다. 서점 매대에 가득 쌓인 잡지 옆에 ‘1인당 1권씩만 구매 가능’이란 종이 푯말이 놓였다. 표지는 1978년 완결된 데쓰카 오사무(手塚治蟲·1928~1989)의 ‘블랙잭’이다.

블랙잭은 ‘아톰의 아버지’ 데쓰카가 그린 의학 만화로, 천재 외과의 블랙잭의 활약을 다룬다. 1973년부터 ‘주간 소년챔피언’에 연재돼 히트했고, 단행본만 전 세계서 1억부 넘게 팔렸다. 올해 ‘블랙잭’ 탄생 50주년을 맞아 다시 연재가 시작된 작품은 인공지능(AI)과의 합작품이다. 생성형 AI인 챗GPT에 블랙잭 200회분과 단편 200편의 텍스트 데이터, 데쓰카가 직접 그린 2만장의 캐릭터 얼굴 데이터, 4000페이지 분량의 배경화면 데이터를 학습시켰다.

AI와 협업한 ‘블랙 잭’이 실린 ‘주간 소년챔피언’의 표지. [사진 아키타쇼텐]

AI와 협업한 ‘블랙 잭’이 실린 ‘주간 소년챔피언’의 표지. [사진 아키타쇼텐]

그렇게 탄생한 신작의 제목은 ‘데쓰카2023 블랙잭:기계 심장- Heartbeat MarkII’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딸의 심장을 고쳐 달라며 블랙잭을 찾아온다. 딸 마리아는 선천적인 질병으로 몸의 기능이 점차 퇴화해 심장을 비롯해 여러 인공장기를 부착하고 살아가는 소녀. 알 수 없는 이유로 기계 심장이 멈추고 블랙잭은 최초로 인공장기 수술을 집도한다.

‘블랙잭이 기계 심장 소유자를 수술한다’는 핵심 줄거리는 AI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소녀 캐릭터와 ‘Heartbeat MarkII’라는 기계 심장 이름도 Al가 생각해냈다. 이미 원작에서 우주인과 유령, 미라까지 수술한 바 있는 블랙잭의 ‘만화적 과거’를 학습했기에 생성 가능한 설정이었다. 제작진은 “남자는 왜 소녀를 살리려 하지?” “기계 심장과 뇌를 가진 존재도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등을 챗GPT에 질문하며 줄거리를 완성해나갔다. AI가 만들어낸 배경 화면과 등장인물의 표정 등을 작화에 반영했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그림체도 예전 그대로, 이야기 전개도 블랙잭다웠지만 원작의 매력이던 기발함이나 시니컬한 유머를 느끼기 힘들었다고 할까. 일본 팬들 사이에서도 반응은 엇갈린다.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어 기쁘다’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너무 뻔한 작품이 나와 실망했다’는 평도 많다. ‘이렇게까지 고인의 이름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느냐’며 제작진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AI가 창작에 본격 활용되는 것은 시간문제, 블랙잭의 부활은 여러 생각할 거리를 안긴다. 한국의 이현세 작가도 AI를 이용한 창작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했는데, AI가 협업한 ‘공포의 외인구단’은 과연 어떤 작품이 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