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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상현의 과학 산책

빼앗길 수 없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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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1941년 1월 15일, 독일 괴를리츠 인근 스탈락 8A 포로수용소의 기온은 영하 10도에 달했다. 난방은 없었다. 정원의 두 배가 넘는 사람들로 수용소는 가득 찼다. 27번 막사, 수백의 군중 앞에 네 명의 동료가 조율을 시작했다. 피아노에는 눌러지지 않는 건반이 태반이었다. 다른 악기의 사정도 비슷했다. 적막을 가르는 클라리넷의 독주. 곧이어 피아노·첼로·바이올린이 만드는 천국의 화음.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의 초연이었다. 전쟁포로였던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의 걸작이다. 첫 악장은 간신히 구한 종이와 연필만으로 작업했다. 그럼에도 29개의 화성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음악에서 색을 느끼던 특별한 재능의 작곡가. 그는 이렇게 내면의 공포에 대답했다.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장 르레이(1906~1998) 역시 포로수용소에서 전쟁의 마지막 5년을 갇혀 지냈던 수학자이다. 그 수용소에서 탈출을 기도한 50명은 즉결 총살당했다. 1930년대 난류 이론으로 유체역학에 혁명을 일으켰던 그는 독일군에게 이용당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현실과 가장 동떨어진 분야, 위상수학의 전문가로 간수들에게 가장했다.

수학에서만큼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는지, 그는 억류된 채로 무한차원 공간의 위상수학을 정말 잘 연구했다. 그가 이 시기에 창안해낸 개념, ‘층 코호몰로지’와 ‘스펙트럼 열’은 현대위상수학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르레이의 개념을 확장한 두 수학자, 코다이라와 세르는 1954년 필즈상을 받는다.

현실의 가혹함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다. 그렇다고 감사와 만족까지 잃어 버릴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나의 몫이다. 수용소에서도 무한의 우주를 탐험하고, 선율의 불꽃놀이를 볼 수 있다. 살아 있음의 증거, 살아내야 할 희망은 종종 빼앗길 수 없는 무언가 속에 있다.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