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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판깔자’ 음악에 미친 영재들, 20시간 짜리 음악회 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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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 출신으로 새로운 무대와 음악을 꿈꾸는 CML 앙상블. 왼쪽부터 진영훈(바이올린), 배진우(피아노), 이민주(지휘), 정이든(바이올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 출신으로 새로운 무대와 음악을 꿈꾸는 CML 앙상블. 왼쪽부터 진영훈(바이올린), 배진우(피아노), 이민주(지휘), 정이든(바이올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소 15시간의 피아노곡이 있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1893년 작품 ‘벡사시옹(vexationㆍ짜증)’이다. 드문 괴짜였던 사티는 18개 음으로 된 주제 선율에 붙인 한 페이지 짜리 악보를 840번 반복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지켜 전체를 연주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1963년 존 케이지가 뉴욕에서 음악가 11명과 함께 18시간 40분 동안 초연했다. 팬데믹 기간이던 2020년에는 독일의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가 15시간 30분 혼자 연주해 유튜브 중계했다.

한예종 영재원 친구끼리 모인 CML 앙상블 #사티 '벡사시옹' 15시간 넘게 공연 예정 #CML 출신 임윤찬, 공연 위해 음악 해설 써

한국에서도 벡사시옹 연주가 열린다. 이달 16일 피아니스트 20명이 모인다. 서울 논현동의 두오모 플래그십에서 오후 5시 30분 시작하는 연주는 다음 날 오후 2시쯤 끝나는 20여 시간을 예상한다. 한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없었던 실험적 무대다. 이를 기획하고 출연하는 음악가들은 젊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영재원(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중학생, 고등학생일 때 만나 갓 20대가 된 지금도 함께 하는 이들이다. 이제 한예종, 서울대의 대학생들이 됐다. 모임의 이름은 CML 앙상블. ’클래시컬 뮤직 리스닝‘라는 이름인데, 리더격인 진영훈(19ㆍ바이올린, 한예종 1)은 “음악에 미쳐서 음악이 얼마나 좋은지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한예종 영재원은 초3~고3의 특별한 재능이 있는 예술가를 위한 교육기관이다. 진영훈은 “영재원에 입학해보니 그중에서도 더 음악에 미쳐있는 애들이 있었다”고 했다. “교실 한쪽에 후드티 입은 애들이 모여 뭔가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지휘자 카라얀과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이더라고요. 저도 그 옆에 앉았고, 그때부터 정말 많은 음악을 들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들은 예술의전당 ’죽돌이‘가 돼 수많은 공연과 리허설에 기웃거리고, 레코드 가게 사장님에게 “너희처럼 자주 오는 사람들은 처음”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2018년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연습실에서 음악 하며 노는 영상, 전설적 음악인들의 연주를 올렸다. 그중 한 명이 지난해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최연소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임윤찬(19)이다.

그러다 직접 무대를 만들기로 했다. 피아니스트 배진우(22)는 “실험적인 걸 하고 싶었고, 자주 연주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대가 없었다”고 했다. “전국 공연장 100여 곳에 소개서와 기획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도 못 들었어요.”(진영훈) 2021년에 서울 한남동의일신홀에서 공연을 열었다. 12명이 갹출해 공연장 대관비 등 제작비를 충당했다. “티켓 구매자가 4명이었어요. 그때 깨달았죠. 연주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구나.” 그 후 인스타그램으로 홍보하고, 후원자를 모집하고, 연주 영상도 꾸준히 올렸다. 성과가 있어, 이달 4회 열리는 공연에는 후원자 18명이 모였다.

해외의 뛰어난 연주자들에게도 연주 제의를 과감히 한다. 한 러시아 피아니스트에게 간곡한 e메일로 앙상블을 청해 가능한 수준에서 출연료를 합의 보기도 했다. 또 CML 멤버들의 독주회를 수시로 열고 녹음해 음반도 낸다. “우리는 다양한 무대에 많이 서고 싶은데, 검증된 연주자가 아니면 기회가 너무 없어요. 직접 나서서 만드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죠.”(정이든ㆍ21)

2021년 일신홀에서 공연했던 CML 앙상블. 사진 CML 앙상블

2021년 일신홀에서 공연했던 CML 앙상블. 사진 CML 앙상블

사티의 벡사시옹 연주도 직접 기획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티켓을 판매해서 수익을 맞춰야 한다면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진영훈은 “이번 연주에서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예술에 대한 생각에 너무 묶여있다고 생각해요. 같은 소절을 840번 온종일 반복해도 엄청난 숭고함은 없을 거예요. 사실 예술은 이렇게 별거 아니고 누구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CML 페스티벌 앙상블은 벡사시옹 연주를 포함해 총 4번 공연을 연다. 20일 실내악 콘서트, 26일 바그너 콘서트, 28일 오케스트라와 독주자의 협연이다. 20일에는 CML 멤버인 작곡가 이하느리(17)의 피아노 4중주를 연주한다. 자신의 색을 과감히 표현해 차세대 스타로 입소문 난 작곡가다. 이밖에 CML은 쇼스타코비치ㆍ드보르자크의 피아노 3중주와 4중주, 피아노로 연주하는 바그너의 오페라 서곡과 주요 장면 음악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등을 연주할 예정이다. 멤버들이 하나하나 모아 만든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피아노 배진우ㆍ박대호ㆍ정예찬, 바이올린 진영훈ㆍ정이든ㆍ박서현, 비올라 최석훈ㆍ이태형ㆍ우지윤, 첼로 채태웅ㆍ김승민ㆍ조이한 등이 출연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 출신으로 새로운 무대와 음악을 꿈꾸는 CML 앙상블. 왼쪽부터 진영훈(바이올린), 배진우(피아노), 이민주(지휘), 정이든(바이올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 출신으로 새로운 무대와 음악을 꿈꾸는 CML 앙상블. 왼쪽부터 진영훈(바이올린), 배진우(피아노), 이민주(지휘), 정이든(바이올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오래된 친구들의 공연을 돕기 위해 프로그램 노트를 기고했다. 마지막 공연의 모차르트 협주곡 24번에 대한 글이다. “계속해서 넓어져 가는 우주에 있는 지구에서 모차르트는 음악으로  내 마음의 도덕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음악가였습니다. 비극적인 운명을 처절하게 거부하는 모차르트의 노래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유기체가 되었죠.” 구름 떼 청중을 몰고 다니는 임윤찬의 보기 드문 글이다.

진영훈은 “앞으로 하고 싶은 공연이 많다”고 했다. 스케일이 크다. “세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슈톡하우젠의 그루펜, 또 헨델의 오페라들을 공연해보고 싶어요.” 그는 “무모하게 미친 짓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 음악에 미쳐있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무대와 연주를 내놓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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