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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원·전두환 때 안된다더니…"재판 생중계 추진" 법원이 변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모든 당사자와 방청객들에게 녹화 장비를 쓰는 것을 허가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개입’ 혐의 1심 재판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현지시간에 맞춰 TV나 유튜브에서 실시간으로 재판을 시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재판 영상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 8월, 해당 사건 1심 심리를 맡은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고등법원의 스콧 맥아피 판사가 트럼프 전 대통령과 함께 기소된 다른 피고인 18명의 재판 TV 생중계를 전면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난 9월 6일(현지시간) 정식 재판을 시작할지를 결정하는 예비심문(preliminary hearing)부터 트럼프 전 대통령의 모든 재판 과정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기 시작했다.

 지난 9월 6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고등법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개입 혐의 재판이 열리고 있다. 사진은 유튜브로 생중계된 화면을 캡쳐한 모습. 사진 유튜브 캡쳐

지난 9월 6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고등법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개입 혐의 재판이 열리고 있다. 사진은 유튜브로 생중계된 화면을 캡쳐한 모습. 사진 유튜브 캡쳐

최서원 씨. 뉴스1

최서원 씨. 뉴스1

한국은 반대의 풍경이 펼쳐졌다. 지난 2018년 ‘국정농단’ 사건으로 항소심 재판을 받던 최서원(67·개명 전 최순실)씨 측은 재판부에 “재판 전체 과정을 생중계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은 대법원 규칙상 1~2심은 재판 시작 전이나 선고만, 그마저도 ‘공익이 인정되는 경우’ ‘피고인이 동의하는 경우’에 한해 중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선고를 유튜브 채널 등으로 중계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제외하면,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는 헌법 제109조는 사실상 법원을 직접 찾아온 시민들과 기자들에게 방청을 허용하는 식으로만 실현돼 왔다.

그나마 2018년 4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 중계로 본격적으로 확산되나 싶었던 하급심 중계는 2018년 10월 이명박 전 대통령 횡령 사건 1심 선고 이후 0건으로 멈춰섰다. 2020년 11월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자명예훼손 1심 선고 등에서도 각종 매체들이 중계를 요청했지만 법원은 불허했다. 하급심 선고 중계가 흐지부지된 건 “피고인이 대부분 반대한다”는 명목상의 사유 외에도 “개별 법관에 대한 공격이 심화될 수 있어, 그 자체로 부담”(현직 서울 소재 법원 판사)이라거나 “선고만 중계하는 건 실익이 적고 피고인의 인격권 침해 우려도 있다”(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계산의 결과물이었다.

행정처, 법원방송 개국 검토…“정보 접근권 보장”

 그러던 법원이 재판중계를 전담하는 ‘법원방송’을 세워 미국식 재판 중계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최근 ‘사법의 투명성과 책임성 확보를 위한 재판중계방송 중심의 법원방송 시스템 구축방안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정책연구용역 결과 보고서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보고서에서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소장은 “국민적 관심이 큰 사건들은 방청 수요가 많아 법정 수용인원을 초과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재판 중계를 통해) 국민에게 정보 접근권을 보장하고, 재판 과정의 정확성을 높이며 국민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

노 소장은 하급심 재판 전 과정도 중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선고 과정에서 어떻게 정의가 구현되는지 등에 대해 국민의 신뢰도를 높일 필요성은 하급심도 예외는 아니다”라며 “재판장의 명령에 의한 경우에는 공판·변론 절차 등의 심리 과정 자체를 중계방송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것이 향후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 국회방송이나 YTN사이언스, 아리랑TV 등을 법원방송의 모델로 제시한 노 소장은 “2025년 1월 법원방송 개국을 목표로 할 경우 최소한 2023년 하반기부터 방송국 설립을 준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난 2018년 4월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민원인들이 텔레비젼을 통해 생중계되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을 지켜보고 있다. 뉴스1

지난 2018년 4월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민원인들이 텔레비젼을 통해 생중계되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을 지켜보고 있다. 뉴스1

 법원 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서울 소재 법원의 한 현직 판사는 “표정과 손짓 하나까지 오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걱정을 내비쳤다. 이해득실에 따라 사법부를 비난하는 경향이 재판 중계로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재판 중계가 이미 활성화된 미국에서도 나오고 있는 이야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판 중계에 대해 닉 애커먼(전 워터게이트 사건 특검보) 변호사 역시 뉴욕타임스에 글을 써 “아무리 판사가 법정을 통제한 경험이 많더라도, 트럼프는 방송에서 제스쳐나 적절한 타이밍에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을 통해 여론을 흔들고, 이를 통해 재판의 엄숙함을 훼손하려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 소재 법원에 근무 중인 한 판사는 “유·무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부가 여론의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변호인이나 검찰이 여론을 의식해 법리나 사실관계보다는 극적인 연출에 치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권 침해에 민감한 국내 특성상, 공개를 원치 않는 정보가 재판 과정에서 공개될 경우 사법부를 상대로 한 법적 분쟁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실제로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2020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A씨는 ‘대법원 홈페이지 등에 올라온 공개변론 영상에 얼굴과 실명이 노출돼 초상권 등이 침해됐다’며 국가 상대 손배소를 제기하기도 했다. 1~2심에서 일부승소한 A씨는 현재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재판 중계, 사법부 신뢰 회복 묘책 될까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여러 우려에도 법원이 재판 중계를 추진하고 있는 건, 국민들이 재판을 직접 보고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너진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2015년 사법정책연구원이 성인 남녀 98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재판 방청·참여 경험이 있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사법 절차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연구에서 일반 국민은 30.4%만이 ‘법원을 신뢰한다’고 답했지만, 재판을 경험한 국민은 44.4%가 재판을 신뢰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재판 생중계를 처음으로 시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12년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재판 전 과정을 TV로 중계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던 이유다.

재판 중계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관련 규정부터 바꿔야 한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구속된 피고인이 죄수복을 입고 재판에 나오는 관행이나, 수갑을 차고 재판을 받게 할 수 있는 현 규정도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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