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덕담'까지 한국 표로 계산했다...간절함이 부른 엑스포 착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8일(현지시간)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열린 2030 엑스포 개최지 결정 투표에서 한국은 29표로 사우디(119표)에 패배했다. 당초 예상보다 큰 표차에 엑스포 유치 실패는 책임론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뉴스1

지난 28일(현지시간)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열린 2030 엑스포 개최지 결정 투표에서 한국은 29표로 사우디(119표)에 패배했다. 당초 예상보다 큰 표차에 엑스포 유치 실패는 책임론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뉴스1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간절함은 결국 대국민 희망고문으로 이어졌다. 지난 28일(현지시간) 참패에 가까운 성적표로 돌아온 세계박람회(EXPO·엑스포) 개최지 투표 결과 얘기다.

내부사정을 잘 아는 정부 관계자는 30일 “엑스포 유치가 소위 ‘VIP(대통령) 관심사항’이 되자 어느 순간부터 엑스포 유치 활동은 대통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의 장’으로 변질됐다”고 돌아봤다. 이는 결국 냉정한 상황 판단 대신 기대를 부풀리는 ‘핑크빛 시나리오’가 난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성공 압박감 '과장 보고'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20일(현지시간) 엑스포 유치를 위한 4차 PT에 직접 연사로 나섰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20일(현지시간) 엑스포 유치를 위한 4차 PT에 직접 연사로 나섰다.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이 지난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PT(프리젠테이션) 연사로 나선 이후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한층 강해졌다. 실제 해당 PT가 끝난 이후 민관합동유치위원회와 각 정부 부처에선 “사우디를 지지했던 상당수 국가들의 표심이 한국 지지로 선회했다”는 식의 보고가 줄을 이었다.

지난 7~8월 경에는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문건에 사우디와의 표차가 20표 이내로 좁혀졌다는 문구까지 담겼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사우디가 1차 투표에서 3분의2(122표) 이상을 득표하지 못한 뒤 2차 투표에서 한국이 이탈리아(개최 후보지 로마)의 표를 흡수할 경우 승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투표일이 임박해서는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실 중심으로 사우디와 불과 10여표 차이라는 보고서도 작성했다. 간절함이 ‘희망적 수치’를 믿게 만든 격이었다.

尹 "예측 많이 빗나갔다", 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9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무산과 관련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9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 무산과 관련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뉴스1

하지만 이런 예측은 결과적으로는 ‘허위보고’가 됐다. 윤 대통령이 지난 29일 대국민 담화에서 “예측이 많이 빗나간 것 같다”고 언급한 배경이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이는 한국에 유리한 몇 번의 가정적 상황이 연속으로 발생해야 겨우 달성 가능한 시나리오를 아전인수식으로 분석한 결과였다고 한다. ‘건투를 빈다’는 정도의 덕담인 “한국의 입후보를 지지한다” 등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입장을 밝힌 회원국도 한국 지지 국가에 포함해 계산하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28일 부산 동구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2030부산세계박람회 성공 유치 시민응원전. 뉴스1

지난 28일 부산 동구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2030부산세계박람회 성공 유치 시민응원전. 뉴스1

이런 과정에서 냉정한 분석은 오히려 ‘열정 부족’으로 매도됐다. 박진 외교부 장관을 포함해 각급에서 BIE 회원국을 접촉해 온 외교부는 “근접했다”는 표현을 쓰는 건 섣부르다며 낙관론을 경계했는데, 대통령실 일각에서는 “패배주의에 물들었다”는 취지의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과장보고에 사우디 '전략분석' 실패까지 

상상을 뛰어넘은 사우디의 선거전략도 판세 분석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엑스포와 같은 국제 투표전은 사실 경쟁의 룰 자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엑스포 참패 뒤 ‘오일 머니’에 대해 부정적 시각도 표출됐지만, 사실 이런 선거전에서는 각국이 스스로 용인할 수 있는 수준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할 뿐이다. 한 소식통은 “우리는 ‘칼싸움에 총을 가져오는 법이 어디있냐’고 하겠지만, 상대방은 ‘총싸움에 왜 칼을 가져왔냐’고 할 수 있는 게 국제 투표전”이라고 전했다.

지난 28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의 2030 엑스포 유치가 확정된 이후 환호하는 사우디 대표단. 연합뉴스

지난 28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의 2030 엑스포 유치가 확정된 이후 환호하는 사우디 대표단. 연합뉴스

실제 사우디는 한국에 지지를 표명한 국가를 상대로 ‘한국이 약속한 것보다 더 큰 지원을 해 주겠다’며 표 빼앗기 전략을 사용했다. 한국이 다녀가면 사우디가 다시 방문해 더 큰 선물을 약속했다. 한국이 투표에 참여하는 파리 현지 대표들 포섭에 나서자, 투표 당일엔 파리 시내의 호텔 2~3곳을 전체 대관해 일부 BIE회원국 본국의 장·차관급 인사를 묵게 하는 등 마지막까지 철저한 표 단속에 나섰다. 물론 이들이 파리까지 오는 항공비도 사우디가 냈다고 한다.

실제 투표에서는 10여표 정도가 기권표로 분석됐는데, 상당수가 한국 지지국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이 역시 사우디가 움직인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서면으로 한국 지지를 약속한 국가 중에서도 이탈표가 나왔다고 한다.

엑스포 참패가 낳은 '책임론'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예상을 뛰어넘은 완패는 결국 책임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초 유임 가능성이 점쳐졌던 박진 장관 교체 등이다.

물론 선거전에서 말초신경 역할을 한 건 현지 공관이고, 외교부는 무거운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사실 엑스포 유치전의 주무부처는 외교부가 아닌 산업통상자원부다. 또 외교부는 정부 내에서 가장 보수적으로 표를 계산하며 신중한 입장을 보여왔다.

특히 외교부는 엑스포 유치 경쟁이 남긴 핵심 자산인 ‘외교 네트워크’를 이어갈 주무부처라는 점에서 박 장관 경질이 여러 국가에 특정 함의를 줄 여지도 있다. 박 장관은 29일 국·실장 회의에서도 “누가 우리를 지지했고 아니고를 따지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결과에 상관없이 유치 경쟁 과정에서 각국에 약속한 지원을 그대로 이행해 우리의 외교적 자산으로 활용하자”는 취지로 강조했다고 한다.

"반성하되 '엑스포 자산'은 이어가야"

박진 외교부 장관은 3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엑스포 유치 실패와 관련 "겸허히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박진 외교부 장관은 3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엑스포 유치 실패와 관련 "겸허히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박 장관은 3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판세를 가급적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읽으려 노력했다”면서도 “다만 우리가 기대한 만큼에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겸허히 반성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투표 결과와 별개로 사우디는 한국의 대(對)중동 핵심 협력 대상국이란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결과에 승복하며 패인을 분석해 재도전에 나서되, 사우디의 엑스포 유치를 축하하며 ‘엑스포 특수’도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중간 점검에서라도 상황이 어려울 것 같으면 ‘플랜B’로 돌아서는 유연함을 발휘했어야 했는데 판단과 의사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며 “반성할 점은 철저히 체크해야겠지만, 이번 유치 활동으로 축적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중요성이 커지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