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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 11월 수상작] 현대인의 고독한 일상을 공감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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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장원

환승입니까?
정해선

아무런 연고 없는 지상의 언저리를
무작정 달려가는 일상이 곧 터널이라
어플이 놓친 노선을 차창에 그려본다

뫼비우스 함정 같은 외길에 부딪히다
퇴로 없는 그곳을 당신도 지나쳤는지
점멸등 깜빡이듯이 하루가 손 흔드네

◆정해선

정해선

정해선

충북 보은 출생. 충북대 임학과 졸업. 제31회 전국한밭시조백일장 입상. 2021년 공직문학상 은상 수상. 현재 충북도 산림녹지과 근무.

차상

폭포
오세춘

한 조각 거울 절벽 빗질하는 푸른 폭포
별무늬 찰랑대는 세모시 발 사이로
한지 등 차오르는데 누구를 기다리나

차하

어떤 물음
조우리

새로워야 한다기에 백지를 접었었다
쉬워야 한다기에 곁으로 모셔왔다
정형을 지키기 위해 모서리를 지웠다

주류와 비주류를 알아본 주인처럼
유행과 깊이들로 자릴 놓는 심사평에
시간의 압박 골절을 미덕으로 남겼다

시절을 덧칠하듯 빈 허공 메우다가
시차로 다다르는 뜬구름 눈썹마다
희디흰 붓질을 마친 궁리라는 속눈썹

꽃 패를 다스리고 예를 알아야기에
비바람 부는 날도 뜬눈으로 지새웠다
나라는 구덩이 앞에 텅 빈 여백 움직였다

이달의 심사평

11월은 ‘중앙 시조 백일장’ 월 응모작을 마감하는 달이다. 1월부터 11월까지 당선된 33명의 응모자가 갈고 닦은 야심작들을 가려내야 하는 12월을 위해서다. 12월에는 그동안 절차탁마의 시간을 보내온 이들 중 단 한 명이 새로운 시조시인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 장으로 등단 절차를 마친 역대 당선자들 중 많은 시인들이 현재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중앙 신춘시조’는 그 위상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11월의 장원은 정해선의 ‘환승입니까?’다. 제목과 내용의 거리가 긴장을 유도하고 있다. 그렇게 편리하다는 “어플”도 노선을 제시하지 못하여 “일상이 곧 터널이” 되고 마는 현실이 쓸쓸하게 와 닿는다. “뫼비우스 함정 같은 외길에” 서서 의지하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당신”조차 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식한 화자의 고독함도 잘 묘사되었다. 욕망과 결핍으로 방황하는 현대인들이 살아내어야 하는 “하루”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도.

차상은 오세춘의 ‘폭포’다. 폭포를 “거울”, “찰랑대는 세모시”, “한지” 등의 참신한 비유로 동양화 한 폭을 완성해 놓았다. 상상력이 돋보인다. 하강과 상승의 대비를 통해 그리움, 혹은 기다림이라는 주제에 가닿게 한 언어 부림이 시조 쓰기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보이고 있었음도 알겠다. 단수는 시조의 본령이다. 좋은 단시조는 짧으나 긴 여운을 준다.

차하는 조우리의 ‘어떤 물음’으로 정한다. 좋은 시조를 쓰기 위해 고심하고 퇴고하는 과정이 잘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좋은 시조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도 잘 나타나 있다. “시간의 압박 골절을 미덕으로 남”기고 “비바람 부는 날도 뜬눈으로 지새”우며 습작에 몰두한다는 진술이 이 ‘중앙 시조 백일장’에 임하는 응모자의 모습이라 매우 아름답고 치열하게 다가왔다.

김복희·남경민·이정순의 작품도 오래 들여다보았다. 더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강현덕·손영희(대표집필)

초대시조

나랑 놀았다
최양숙

불 끄고 밝아진 방
누가 나를 들여다본다

만지고 부수다가
구석으로 밀기도 하고

암호를 기억하느라
발끝까지 뒤적인다

잊어가는 방식에 대해
불 켜고 어두워진 방

아무도 보이지 않아
이름만 불러본다

어떻게 그림자들을
놓을까요, 서로를

◆최양숙

최양숙

최양숙

조선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9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조집 『활짝, 피었습니다만』, 『새, 허공을 뚫다』. 열린시학상, 시조시학상, 무등시조문학상 등 수상.

하루해가 저물고 그 자리에 어둠이 채워진다. 바깥을 향했던 창에 커튼을 치고 불을 끈다. 불을 껐는데 방이 밝아졌다. 불을 끈 그 어둠의 시간이야말로 온전히 나와 마주하여 나를 들여다볼 수 있기에 시인은 밝은 시간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해석해 본다. “나를 들여다”보는 누군가는 타자화된 무의식 속의 또 다른 나일 수도 있고 내 안에서 여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그 누구, 혹은 어떤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하루를 살아냈지만 삶은 여전히 풀 수 없는 화두로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그런 삶을 방관해야 할까. 아니면 “만지고 부수다가 구석으로 밀기도 하”고 “암호를 기억하느라 발끝까지 뒤적”이는 내적 몸부림을 거듭해야 할까.

짧은 이 시조의 행간은 무척이나 넓다. “나랑 놀았다”라는 제목 또한 역설적이다. 낮의 페르소나를 벗고 진짜 나를 찾는, 그러나 끝내 그것은 답이 없는 무수한 질문의 껍질들만 쌓이게 하는 허무한 행위임을 암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짐 지워진 절대고독을 다르게 말한 것이 아닐까. 만지고 부수고 구석으로 밀어도 찾을 수 없는 나, 발끝까지 뒤적여도 끝내 풀 수 없는 삶. 인간은 고독한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은 또다시 “불 켜고 어두워진 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시인은 서정적 자아를 내세워 삶과 세계에 질문한다. “어떻게 그림자들을 놓을까요”라고. 여기서 ‘그림자’는 칼 융이 말하는 무의식 속에 자리한 내면의 그림자와 겹쳐 읽어도 좋으리라. 만상이 깊은 침잠을 준비하는 11월. 오늘밤 ‘나’라는 질문 하나를 묵상이라는 책상 위에 얹어 두고 또 다른 나랑 한번 놀아보자.

서숙희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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