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 시조 백일장 - 1월 수상작] 속엣말 피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장원

속엣말 피다
오시내

물이 한창 올라도 꽃소식은 캄캄하다
잎사귀만 자라서 소문이 우거진 수국
입 다문 탓이었는지 손짓 몸짓 부푼다

삼 년이면 말끝에 봄볕 송이 맺힐 텐데
서먹한 눈망울은 아직도 먼 곳에 있어
이전 색 묻지 말란다 붉게 폈던 한나절

꽃으로 피고 진 곳 뿌리는 기억하는지
흙냄새 오려서라도 아물어가는 속엣말
밤마다 꽃을 연습해 말이 피는 월남댁

◆오시내

오시내

오시내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4학년 재학중, 동서문학 소설 맥심상.

차상

사막 시대
김정애

한 손엔 지팡이 또 한 손엔 장바구니
무릎 짚고 선 낙타 오픈런이 뜨겁다
긴 행렬 유목민 장터 식품 사막 진풍경
0.78 출산율 모래 위의 빌딩들
리트머스 붉게 번지듯 섬으로 물든 도시
숫눈길 발자국처럼 쿠세권*에 밀린다
아기 울음 멈춘 곳 번식하는 모래바람
꽃피는 아몬드나무 그 향기 그리운 날
혹 달린 변방 사람들 사막을 업고 간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상품을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까지 배송이 완료되는 지역이란 신조어.

차하

남대천
김복희

대관령 능선따라 펼쳐진 불꽃 하늘
하루를 접는 발길 일부러 멀리 돌아
아버지 함께 걸었던 강둑 위를 걷는다

한평생 갈대처럼 흔들리며 살아온 삶
엇 단추 끼운 채로 절룩이며 키운 남매
저 나름 곧은 길 찾아 새 둥지로 보내고

땅거미 딛고 서서 아버지 된 나를 본다
받기만 했던 은혜 되돌려 줄 길 없어
한 걸음 떼기도 전에 터져 버린 이 설움

이달의 심사평

새해, 시조의 꽃이 피길 염원하듯이, 시조백일장에 열정과 정성을 들여 응모한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1월 장원으로 제목부터 눈에 띈 오시내의 ‘속엣말 피다’를 올린다. 정형미학에 충실하면서 섬세한 서정의 올을 꿰어 짜임새 있게 꽃을 피운 가작이다. “물이 한창 올라도 꽃소식은 캄캄”해 입이 잘 열리지 않는 “월남댁” 말이 빨리 늘지 않는 “월남댁”의 애환을 남다른 시선으로 잡아내 소재를 삼은 것은 참신했다. “월남댁”을 “수국”으로 환치시켜 “밤마다 꽃을 연습해 말”을 피울 수 있게 따스한 심상으로 종장까지 끌고 간 시상의 전개가 돋보였다.

차상은 김정애의 ‘사막 시대’를 올린다. “오픈런”, “쿠세권”, “낙타”를 등장시켜 현실을 조명하고, 심각한 “출산율” 문제 등, 빠르고 편리한 생활, 그 이면의 맥을 짚어 도시의 사막화를 그리고 있다. “사막”으로 변모해가는 세태의 변화, 시대의 흐름을 개성 있게 잘 포착해냈다. 장과 장이 일부 툭 끊기는 부분은 각 장을 물 흐르듯 연결시켜야 읽기에도 안정감이 있다.

차하는 김복희의 ‘남대천’을 올린다. 어린 연어가 떠났다가 성장한 후 알을 낳으러 다시 돌아오는 ‘남대천’ 그곳에서 “아버지”의 평생을 떠올리며 그리운 “아버지”의 존재가 되어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담아냈다.

시조시인 정혜숙, 이태순(대표집필)

초대시조 

화이트아웃
조금숙

하늘 한 귀퉁이 강렬한 햇살이
이력서 두께만큼 수직으로 쏟아져
세상에 각을 세우다 눈이 먼 하루
혼돈의 청춘에게 절룩이는 좌표는
사막에 무릎 꿇은 낙타와도 같아서
한 발은 늘 달구어져 출발선에 선다

◆조금숙

조금숙

조금숙

경북 군위 출생, 2003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소수언어박물관』, 『중인당 한의원』, 『햇살에 눈을 찡긋거리다』, 2023년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문학작품집 발간지원금 수혜.

시간만큼 나이만큼 공평한 것도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며 똑같이 누리고 받는 것이기에. 해가 바뀌고 모두 자기 나이에 한 살씩을 더 얹은 2024년 새해도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다. 나이를 먹는 만큼 더 힘겹고 불안한 사람들, 특히 인생의 변곡점에 이른 청춘에게 더욱 그러하리라.

화이트아웃은 눈보라나 폭설로 햇살이 눈에 반사되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으로 가시거리가 제한을 받는다. 시인은 ‘화이트아웃’이라는 불가항력 앞에서 절망하면서도 희망을 향해 발을 내 딛는 오늘의 청춘을 격려하고 있다.

밤새워 쓴 자소서며 숱하게 들이민 이력서가 얼마나 많았으면 일시에 눈앞을 새하얗게 바꿔버리는 “강렬한 햇살”의 두께만큼 될까. 거듭되는 실망과 좌절은 “세상에 각을 세우”게 하고, 다잡았던 의지는 “절룩이는 좌표”로 흔들리지만 “화이트아웃”은 잠시잠깐의 현상일 뿐이다. 쉽게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것, 청춘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 아닌가. 길도 없는 끝없는 사막에서 낙타는 잠시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그 무릎은 굴복의 무릎이 아니라 입 가득 피를 흘리면서도 가시풀을 먹고 다시 일어서는 용기의 무릎이다.

두 수로 된 이 시조는 난관, 좌절, 의지, 희망을 순차적으로 은유하면서 “한 발은 늘 달구어져 출발선에 선다”는 결구로 청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푸른 채찍 같은 메시지가 되고 있다.

서숙희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