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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 2월 수상작] 봄 언저리에서 남은 겨울을 떠나보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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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장원

줄 하나 그어놓고 창이라 했다
윤정욱

장원

장원

닫을 수 없는 창에 창틀을 세운다
줄 하나 그어놓고 창이라 했는데
오가는 발길에 차여 골목이 되었다

사방이 열려있어 일찍 오는 저녁 추위
호떡을 담은 봉투 모락모락 꽉 찬 속에
달빛이 걸터앉는다 끼니로 만든 집

발걸음 모두 떠나고 누운 별빛 돌아본다
하루치 허리펴고 줄로 만든 창을 닫는다
노점상 굽은 등 업고 새벽 창을 넘는다

◆윤정욱

윤정욱

윤정욱

방송통신대학 국문과 3학년 재학. 2023년 7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차상

실어증
이연

온종일 파 앞에서 눈물을 썰어 낸다
대파 안에 스몄을까 당신의 목소리
어제를 벗겨내 보면 싱싱한 말 들린다

머릿속에 갇힌 만큼 하얀 말 굵어지고
얇아진 껍질처럼 그 음성 말라갈 때
잘게 썬 웃음소리가 눈가로 스며든다

파랗게 웃자라다 꺾어진 지난날들
눈물을 감추려고 어슷하게 대파를 썰면
내 귀는 쫑긋한 채로 당신 입만 바라본다

차하

쩡쩡
윤영화

한 스푼 된장찌개
목 넘긴 겨울중턱

후~하고 입김 불면
풋냉이 돋아날 듯

청보리
입춘을 쥐고
언 땅을 깨고 있다

이달의 심사평

북쪽에는 큰 눈이 내린다고 하는데 우리 집 뜨락의 조팝나무는 제 이름처럼 좁쌀 같은 꽃눈을 열심히 만들고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벼리는 나무들처럼 이달에도 예비 시인들의 고심한 흔적들을 읽고 또 읽었다. 보내온 작품들은 우리네 일상에서 얻어지는 곡진한 사유가 깃든 작품이 다수였다.

2월 장원에는 윤정욱의 ‘줄 하나 그어놓고 창이라 했다’를 앉힌다. 제목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골목의 포장마차가 있는 풍경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포착하여 형상화했다. 둘째 수 초장 “사방이 열려있어 일찍 오는 저녁 추위”며 종장인 “달빛이 걸터앉는다 끼니로 만든 집”은 절구였다. 보내온 다른 작품들도 시조에 들인 시간을 짐작할 수 있어서 믿음이 갔다.

차상에는 이연의 ‘실어증’을 앉혔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발상이 좋았으며 비교적 무난하게 읽혔다. “어제를 벗겨내 보면 싱싱한 말 들린다.” 그리고 “얇아진 껍질처럼 그 음성 말라갈 때”는 예사롭지 않은 구사였다. 종장의 묘를 잘 살리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같이 보내온 ‘컷터날’ 역시 고심한 흔적이 보였으며 제목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하는 윤영화의 ‘쩡쩡’을 앉혔다. 시조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45자 내외의 간결한 시형에 분명한 색깔로 이야기를 담아냈다. 시조의 꽃인 종장 “청보리 입춘을 쥐고 언 땅을 깨고 있다”는 지축을 울리며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정순·전미숙·김은희의 작품에도 눈길이 오래 머물렀으며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정혜숙(대표집필)·이태순

초대시조

잔설
최재남

햇살조차 외면하는 바위틈에 쪼그려

남은 흔적 지우려다 서로를 껴안는다

하얗게 얼룩진 그늘, 그마저도 꿈인 듯

가늘어진 숨으로도 이 겨울 다 적시나

뿌리째 목이 말라 야위어진 이끼가

차가운 손을 붙잡고 푸릇푸릇 일어선다

◆최재남

최재남

최재남

2008년 ‘시조21’ 신인상 등단.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시조집 『바람의 근성』 『섬의 시간』

입춘도 우수도 지났다. 요 며칠째 찬비와 눈발이 계속되었지만 봄은 어디쯤에서 얼어붙은 대지의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있을 것이다. 2월은 겨울과 봄 사이 징검돌 같은 달이다. 긴 겨울의 시간과 결별하고 새봄을 맞이하기에 앞서 아직 남은 겨울의 흔적이 잔설이다.

이 시조는 먼저 한 장을 한 연으로 배치함으로써 잔설이 지닌 외연적 의미를 시각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첫 수가 그려놓은 시적 상황은 “잔설”이 처한 안타까움이다. “햇살조차 외면하는 바위틈”인 음지에서 잊혀가는 희미한 존재로, 그마저도 곧 사라질 흔적에 불과하여 “서로를 껴안”고서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을 흰 평화처럼 덮으며 장관을 이뤘던 기억은 “얼룩진 그늘”로  남아 “그마저도 꿈인 듯”하다.

그러나 둘째 수에서 잔설의 의미는 반전되어 소멸로 가는 길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늘어진 숨으로도” “뿌리째 목이 말라 야위어진 이끼” 등의 하강적 시어들이 만든 부정적 상황은 곧바로 “이 겨울 다 적시”고 “푸릇푸릇 일어서”는 상승적 정서로 고양되고 있다.

온 누리를 가득 채웠다가 몇 조각 겨울의 흔적으로 남은 잔설은, 흩어지고 찼다가 기울고 피었다가 사위는 세상의 이치를 제유(提喩)하고 있다. 흩어지고 기울고 사윔은 채움과 충만의 약속이자 기약이 아닌가. 마지막 수의 종장이 주는 암시가 그러하다. 이 시조에서 “잔설”은 덧없이 사라지는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과 채움이라는 긍정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서숙희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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