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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 10월 수상작] 스스로 호흡을 닫은 돌고래를 떠올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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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장원

스트랜딩

스트랜딩

스트랜딩
나정숙

라일락 이파리는 첫사랑의 비린 맛
한 잎 떼 넣어주던 바다 빛 눈동자에
수줍은 이야기들이 글썽글썽 걸려있다

수평선 꼬리에 걸고 바람살 조준하면
돋을볕 과녁에서 터지는 금화살들
C단조 휘파람 소리 촤르르 쏟아진다

물결 위 되돌이표 출렁이는 기억 너머
목구멍 동굴 속엔 해초들 자라나고
검은 새 슬픔을 향해 일제히 고개 돌린다

한때의 물길 따라 서투른 사랑 가고
마지막 호흡 닫고 바다 깊이 몸을 던진
돌고래 루시드 드림
파도 울음 한 자락

◆나정숙

나정숙

나정숙

광주광역시 출생.

조선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후조·우듬지 동인.

차상

나이주의(ageism)
황혜리

육십오 세 이후에는 문밖이 소심해져
갈피를 잡지 못한 내일이 서성이지,
엄마가 혼잣소리로 건반을 두드린다

반음씩 올라가는 음계를 내려가며
애매하게 평등해진 오늘처럼 머쓱한 날
경로는 우대가 아니라 우려라고 웃으신다

온 집안에 흘러드는 귀에 익은 피아노곡
쇼팽은 총지휘자 왈츠는 시작되고
안무도 정해졌는데 나는 늘 모호하다

삼십 중반 내 나이도 안팎이 소심해져
몇 가지 자격증을 가방 속에 챙겨 넣고
오늘도 취업전선에 총대 메고 나선다

차하

10월의 표정
전미숙

노란 전구 벌의 몸속 달콤한 노란빛
휩쓸린 맵찬 바람에 휘몰아 오르려다
턱 걸린 검은빛 얼굴 빨간 여우
매서운 눈

중턱에 부딪혀 표정 잃은 세모난 모자
호박 속 맑은 눈 어린 생쥐 하얀 얼굴
떨켜에 미련 두지 않고 굳게 닫은
그 입술

이달의 심사평

때가 되었다. 릴케가 말하는 때, 가을. 지난여름은 대체로 가혹했으나 그래도 위대했다. 붉은 사과와 노란 모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들판의 누런 벼들도 증거물이다. 또 이 마당의 알곡 같은 투고작들도 그것을 보여준다.

10월 장원은 나정숙의 ‘스트랜딩’으로 선했다. 고래의 집단 자살을 일컫는 스트랜딩은 아직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지만 전 세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기현상이다. 그래서 화자는 고래의 서사를 추측해 보는 것이다. 바닷속에도 사랑이 있어 올 때의 기쁨과 갈 때의 슬픔이 “마지막 호흡 닫고 바다 깊이 몸을 던진” 이유일 것이라고. 이 서정적 상상력과 활달한 이미지 직조는 “루시드 드림”이라는 말로 마무리하면서 완성도를 높였다. 꿈인 줄 알면서 꾸는 꿈이라니 그 슬픔도 울림도 더 깊고 클 수밖에 없겠다.

차상은 황혜리의 ‘나이주의(ageism)’다. 에이지즘은 연령 차별주의를 말한다. 이 작품은 노인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과 청년 실업 문제를 다뤘다. 화자는 “문밖이 소심해”진 “육십오 세”가 넘은 어머니와 “안팎이 소심해”진 “삼십 중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배경 음악을 깔아 놓은 듯 피아노와 쇼팽의 왈츠가 있다. 그러나 엄마도, 화자도 이런 상황들이 애매하고 모호하다. 제도권에서 밀려난 세대와 아직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세대의 우울함과 초조함이 작품 전체에 잘 흐른다.

차하는 전미숙의 ‘10월의 표정’이다. 노랑·검정·빨강·하양 등 색채 이미지로 화려한 향연을 펼쳐놓았다.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보자기처럼 미각과 촉각의 그것도 감싸고 있어 입체감도 준다. 그렇게 짜놓은 10월이라 매우 선명하다.

심사위원 강현덕(대표집필)·손영희

초대시조

푸드덕!
심석정

전철역 승강장에 비둘기 날아들어
잘 닦인 대리석 위 종종대며 미끄러지며
출구는 멀기만 하고 붉은 발이 더 붉다

건너편 승강기는 닫힌 지 이미 오래
몸 디밀 틈도 없는 계단과 사람 사이
절반쯤 열렸던 창은 누구 닫고 떠났을까

숨 가쁜 발자국들 이리저리 흩어지고
환승의 기회마저 속절없이 사라질 때
비상구 푸른 불빛을 창공인 양 푸드덕!
난다

◆심석정

심석정

심석정

경남 창원 출생. 2004년 계간 ‘시조문학’ 등단. 시조집 『향기를 배접하다』 『물푸레나무를 읽다』 『따뜻한 배후』.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성파시조문학상 수상.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20세기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저서 『시지프 신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삶과 죽음, 삶의 무의미와 의미 등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진 그의 문학은 철학에 가깝다.

심석정 시인은 시조 ‘푸드덕!’에서 전철역 승강장에 갇힌 한 마리 비둘기에 우리 삶을 투영하고 있다. 어쩌다가 승강장에 날아든 비둘기는 세상에 기투(企投)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첫째 수에서는 가혹한 오늘의 현실을, 둘째 수에서는 “건너편 승강기는 닫힌 지 이미 오래”이며 “절반쯤” 열렸던 희망조차 닫혀버린 절망스러운 미래를 암시한다.

시지프는 신의 노여움으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올려야 하는 형벌을 영원히 계속해야 하는 인물이다.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 세계는 보편성에 근거한 인간의 윤리와 맞지 않는다. 부조리를 이길 수 없기에 삶을 포기해야 하는가. 카뮈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무의미한 행위를 기꺼이 계속하는 것은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며, 시지프를 부조리에 무릎 꿇지 않는 긍정의 인물로 해석한다.

시인은 말한다. “환승의 기회마저” 사라진 출구 없는 미래라 할지라도 삶이라는 행로는 포기할 수 없는, 붉은 발이 헐도록 가야 하는 것이라고. 이채롭게도 제목에 느낌표까지 붙인 이 시조에서 “푸드득!”은 청각적 시각적 이미지를 동시에 거느리며 독자에게 각자가 처한 삶을 직시하고 긍정하게 한다. “비상구 푸른 불빛”이 비록 창공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오늘도 그곳을 향해 “푸드득!”이라는 긍정의 날갯짓을 계속하는 것이다.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서숙희 시조시인

◆응모안내

다음달 응모작은 11월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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