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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복된 국가 행정전산망 ‘먹통’ 원인…갈 길 먼 디지털 정부

중앙일보

입력

고기동 행정안전부 차관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지방행정전산서비스 장애 원인 및 향후 대책'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고기동 행정안전부 차관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지방행정전산서비스 장애 원인 및 향후 대책'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디지털 정부’ 체면을 구겼다. 일주일 새 국가 관리 전산망에서 최소 4차례 장애가 발생한 것도 모자라 초유의 지방행정전산망 ‘먹통’ 사태 원인은 번복되기까지 했다. 당시 행정안전부(행안부)가 전산망 마비의 원인을 발표하기까지 53시간이 걸렸는데, 발표 일주일 만에 바뀐 것이다. 학계 등에선 “전면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먹통 사태 원인, ‘라우터’ 장비 불량

26일 행안부에 따르면 지난 17일 오전 8시 46분쯤 전국 지방자치단체(지자체) 공무원이 사용하는 행정전산망 ‘새올’이 마비된 원인은 서로 다른 네트워크를 연결해주는 장비인 ‘라우터’ 모듈(부품) 속 포트의 물리적 손상 때문인 것으로 파악됐다. 포트는 데이터를 주고받는 일종의 통로다. 라우터에 케이블(선)을 낄 수 있도록 한다.

구체적으로 라우터 장비의 포트 3개가 문제가 됐고, 이 중 고장 난 2개가 ‘새올’ 시스템 마비 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조사됐다. 쉽게 예를 들면, 콘센트가 불량이어서 코드를 꽂아도 전기가 흐르지 않았던 셈이다.

다만 포트의 고장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당 장비는 미국 시스코(CISCO)사가 제조하고, 국내 업체인 ‘대신정보통신’이 관리한다. 지난 2016년 도입됐다. 낡은 장비가 아니란 의미다. 이재용 국가정보자원관리원장은 전날(25일) 열린 ‘지방행정전산서비스 장애원인 및 향후대책’ 브리핑에서 “물리적 부품 손상이라 원인을 밝혀내기가 상당히 어렵다”며 “전산상의 기록으로 남는 게 아니다”고 설명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L4스위치’ 문제는 아닌 것으로 파악

애초 행안부는 지난 19일 먹통 사태 원인으로 ‘L4 스위치’를 지목했다. 이 네트워크 장비는 공무원 인증시스템(GPKI)에 연결돼 트래픽을 여러 서버에 배분하는 기능을 한다. 정부는 앞서 16일 L4스위치의 운영체제(OS)를 업데이트했다. 다음날 문제가 불거지자 기존 운영체제로 되돌리고, 부랴부랴 기존 L4 스위치 2대를 고성능 장비로 교체했다. 이후 새올 시스템과 온라인 민원서비스인 ‘정부24’ 시스템이 정상 작동되면서 L4 스위치를 원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하지만 ‘착시’였다. 1500바이트(byte) 이상 데이터 양의 90%가 전송되지 않은 걸 발견하지 못했다. 10%를 보고 정상 작동으로 판단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서보람 행안부 디지털정부실장은 “L4스위치 장비가 (원인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던 건 100%가 아니었다”며 “(L4스위치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했던 것이고, 다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게 라우터”라고 설명했다.

지난 17일 전국 지방자치단체 행정전산망이 시스템 오류로 마비됐을 당시 서울의 한 구청 통합민원발급기에 네트워크 장애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스1

지난 17일 전국 지방자치단체 행정전산망이 시스템 오류로 마비됐을 당시 서울의 한 구청 통합민원발급기에 네트워크 장애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스1

먹통 사태 진단 시작점부터 삐걱

전문가들은 정확한 원인 파악이 전제된 문제 해결의 시작점에서부터 ‘헛다리’를 짚었다고 지적한다. 김형중 호서대 디지털금융경영학과 석좌교수는 “16일 업데이트도 있었고 하니 여기(L4스위치)에만 문제가 있다고 (행안부가) 본 것 같다”며 “(이에) 라우터 장비라는 다른 곳에서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해당 포트는 새올이나 정부24 등 국민과 밀접한 서비스와 관련된 역할을 하는 중요 부분임에도 조사 시작 단계서 문제점을 잡아내지 못했다. 이와 관련, 이재용 원장은 “육안 점검을 통해 일일 점검을 하고 있다”면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고장이 발생하는 것을 미리 잡아내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행안부는 이번 마비 사태가 데이터‧프로그램 등의 손실로 일어난 게 아닌 만큼 ‘백업 센터’를 가동해야 할 상황은 아니라고 봤다. 그러나 현 시스템을 유지한다면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먹통’ 사태가 반복될 수 있다. 염흥열 순천향대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행안부는 장비 전수 점검을 하겠다고 하지만 단기적인 방법일 뿐이고, 장기적으론 문제 자체를 예방하고 해결하는 체계를 새로 마련해야 한다”고 짚었다.

지난 25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지방행정전산서비스 장애원인 및 향후 대책 브리핑에서 송상효 TF 공동팀장이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5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지방행정전산서비스 장애원인 및 향후 대책 브리핑에서 송상효 TF 공동팀장이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주일 새 네 번 장애…“전면 개선 필요”

지난 17일 새올 등의 마비로 촉발된 국가 행정망에 대한 불안감은 나날이 커지는 분위기다. 지난 22일엔 서울 등 일부 지방 주민센터에서 과부하로 주민등록시스템에 일시적인 장애가 발생했다. 하루 뒤엔 국가종합전자조달시스템인 조달청의 ‘나라장터’가 독일 IP(인터넷 주소) 공격으로 1시간가량 지연됐다. 또다시 24일 조폐공사의 모바일 신분증 서비스에 장애가 생겼다. 특히 24일은 ‘디지털 플랫폼’ 정부 홍보를 위해 부산 벡스코에서 ‘2023 대한민국 정부 박람회’가 열릴 때였다.

김형중 교수는 “현재의 시스템은 스마트폰 시대에 마치 ‘폴더 폰’을 쓰는 것과 같아 보인다”며 “예산을 많이 투입해 시스템을 전면 개선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행안부는 2019년 4월 차세대 지방행정공통시스템 구축 사업을 추진했으나, 기획재정부의 예비 타당성 조사(예타) 대상 선정에 5번 실패했고, 지난해 6월에서야 예타가 시작됐다.

한편 행안부는 국가정보관리원 장비 전수 점검과 함께 지자체 및 공공기관 등 각급 기관에도 각각 모든 전산장비를 점검해 달라고 공문을 보내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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