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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 주역의 고향 의령…‘국립국어사전박물관 건립’ 열기 고조

중앙일보

입력

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 한 장면. 사진 네이버 영화

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 한 장면. 사진 네이버 영화

말과 글이라는 게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인데, 그렇게 사라진 우리 조선말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에 나오는 대사다. ‘말을 모은다’라는 뜻이다. 말모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편찬을 시도한 국어사전 원고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자 말모이 원고를 바탕으로 은밀히 『조선말 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조선어학회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발각, 조선어학회 회원과 관련자 33명이 치안법상 내란죄 혐의로 붙잡혀 혹독한 고초를 겪는다. 1942년 10월 실제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해방 후 완간된『조선말 큰사전(1957년)』은 우리말 사전의 초석이 된다.

‘영화 말모이‘ 주역 고향 의령…“국어사전박물관 건립하자”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작업에서 총괄·재정·실무 등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 3명은 경남 의령 출신이다. 영화 속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의 실제 모델인 고루 이극로(1893~1978년) 선생을 비롯한 남저 이우식(1891~1966) 선생, 한뫼 안호상(1902~1999년) 선생이다.

이 때문에 의령에서는이들 독립운동가 정신을 기려 ‘국립국어사전박물관을 건립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선어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고, 흔들리는 국어의 위상을 확고히 하자는 차원이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조선말 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는 모습. 문화재청=연합뉴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조선말 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는 모습. 문화재청=연합뉴스

조선말 큰사전 원고. 보물 2086호(옛 국가등록문화재 524-1호). 한글학회 소장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조선말 큰사전 원고. 보물 2086호(옛 국가등록문화재 524-1호). 한글학회 소장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화 의병장’ 정신 이어…매년 학술대회 개최

국립국어사전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는 오는 29일 의령군민회관에서 “국립국어사전박물관 건립,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의령 국립국어사전박물관 건립을 위한 제4차 학술대회’를 연다. 서정목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김정대 경남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 김덕현 산청교육장(한글학회 경남지회장) 등 학계·교육계 인사가 주제 발제와 토론자로 참여한다. 2020년 10월 민간 주도로 발족한 추진위는 매년 학술대회를 열어 국어사전박물관 건립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국어사전박물관 의령 건립은 윤석열 대통령 공약이었다. 경남도와 의령군도 지자체 핵심사업으로 박물관을 짓기로 하고 정부 예산 확보를 위해 애쓰고 있다. 그간 소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 재원 조달 등을 요청해왔지만, 확정적인 답변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2020년 10월 발족한 국립국어사전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이듬해 10월 경남 의령군 지원을 받아 의령문화에서 현판식을 갖고 본격 업무에 들어갔다. 사진 의령군

2020년 10월 발족한 국립국어사전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이듬해 10월 경남 의령군 지원을 받아 의령문화에서 현판식을 갖고 본격 업무에 들어갔다. 사진 의령군

김정대 경남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등 의령은 예로부터 충의의 고장”이라며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목숨 걸고 우리 말과 글을 지키려 했던 이우식·이극로·안호상 선생은 ‘문화 의병장’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후손들이 이들 선열의 정신을 살려 고향인 의령에 국립국어사전박물관을 세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의령이 낳은 3명, 조선어학회 뿌리”

추진위 등 학계에 따르면 이우식와 이극로·안호상은 조선어 독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연장자이자 ‘만석꾼 부자’ 이우식은 조선어학회 살림살이에 기여했다. 1936~1942년 동안 사전 편찬과 기관지 발행을 위해 조선어학회에 1만7190원을 후원했다. 1920년대 후반 경성방직 여공 한 달 임금이 21원(현 200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17억1800만원 정도 된다.

이우식 선생. 자료 '의령의 인물과 학문6' 캡처

이우식 선생. 자료 '의령의 인물과 학문6' 캡처

이우식은 두 살 아래 고향 후배 이극로가 독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10년 넘게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했다. 비밀리에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도 조달해왔다. 생전 이우식은 ‘나의 부는 내 조상이 덕을 심은 것이다. 내가 어찌 홀로 먹으리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극로는 당시 조선어학회 간사장(현 한글학회장)을 맡아 사전 편찬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해방 후 정부 수립(1948년) 때 초대 문교부장관을 맡아 한글 공교육 초석을 다진 안호상은 사전 집필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의 사전 편찬 작업을 계기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사정(査定)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마련한 것이 큰 성과라고 학계는 평가한다. 이를 통해 어문 규범이 제정, 우리 말 표기의 일관성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이 분단됐지만 ‘언어 이질화’가 적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안호상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 중앙포토

안호상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 중앙포토

이극로 선생. 자료 '의령의 인물과 학문6' 캡처

이극로 선생. 자료 '의령의 인물과 학문6' 캡처

한편 1970년대 이우식(건국훈장 독립장)과 안호상(국민훈장 모란장)은 공로를 인정받아 독립유공자로 포상됐지만, 이극로는 해방 이후 월북해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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