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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난민' 돌연 수십배 폭증…국경 잠근 핀란드, 이 전략에 떤다 [세계 한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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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와 러시아의 ‘난민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핀란드는 22일(현지시간) 러시아와 맞닿은 국경 검문소 중 1곳을 빼고 모두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가 의도적·조직적으로 중동·아프리카 난민들을 핀란드 국경으로 보낸다는 이유다. 핀란드는 향후 남은 1곳도 폐쇄할 수 있다고 예고했다.

핀란드 북부 살라의 국경 검문소에서 난민들이 핀란드 국경수비대 앞에 줄지어 서 있다. AFP=연합뉴스

핀란드 북부 살라의 국경 검문소에서 난민들이 핀란드 국경수비대 앞에 줄지어 서 있다. AFP=연합뉴스

핀란드는 러시아가 난민을 의도적으로 넘기고 있다고 보는 이유는 두 가지다. 갑자기 증가한 난민 숫자와 평소와 다른 조직적인 이동 모습 때문이다. 핀란드 국경수비대에 따르면 이달 러시아를 거쳐 핀란드에 도착한 난민만 600명 이상이다. 과거 한 달 평균 0~10명에 그쳤던 데에 비해 수십 배 늘어났다. 지난 21일엔 하루에 62명의 난민이 핀란드 국경의 문을 두드렸다.

핀란드 국경수비대는 “러시아의 조직적인 긴급 수송 작전”이라고 판단했다. 국경 지대에선 최근 난민 7~11명이 줄줄이 조를 지어 트럭을 타고 들어왔는데, 이를 러시아가 지원했다는 것이다. 페테리 오르포 핀란드 총리는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난민들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고 핀란드 국경으로 수송되는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러시아에 맞대응”…확 바뀐 핀란드

핀란드는 러시아와 1340㎞의 국경을 맞대고 있다. 70여년의 중립노선을 버리고 지난해 4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31번째 회원국이 된 핀란드는 이번 사태를 나토 가입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으로 본다.

과거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을 지켜본 핀란드는 이듬해부터 나토 가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2015년 겨울부터 4개월 동안 1700명의 난민을 핀란드 국경에 보냈다. 이때도 러시아의 공작이라고 의심한 핀란드는 수개월 동안 난민 수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곤욕을 치렀다. 오르포 핀란드 총리는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다.

하지만 핀란드가 난민 사태에 대응하는 방식은 8년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당시엔 수천 명의 난민이 넘어와도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려 했었다. 반면 이번엔 신속히 국경을 걸어 잠그며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나토 가입 이후 핀란드는 대(對) 러시아 외교도 강경해졌다. 지난 6월 핀란드는 첩보활동을 이유로 러시아 외교관 9명을 추방하고 자국 내 러시아 총영사관도 폐지했다. 러시아에 맞대응한 조치지만 핀란드의 외교 역사에선 이례적인 일이다.

핀란드 살라 국경 검문소 텐트 안에서 이주민들이 모여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핀란드 살라 국경 검문소 텐트 안에서 이주민들이 모여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이전까지 핀란드는 강대국 러시아에 숨죽이는 약소국처럼 행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자국 이익은 다소 양보하더라도 러시아의 심기는 건들지 않는 전략을 철칙처럼 여겼다. '저자세 외교'의 상징으로 국제정치학에 ‘핀란드화(Finlandization)’란 용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나토 뒷배 자신감?…진짜 이유는 ‘루소포비아’ 분석도

핀란드의 변화는 나토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1세기 넘는 러시아의 지배와 지속적인 침공에 시달렸던 핀란드엔 '루소포비아(Russophobia, Russia+phobia)'의 정서가 강하다. 한국인 최초로 핀란드 땀뻬레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서현수 박사는 “핀란드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해왔지만 저변엔 ‘루소포비아’가 깔려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공포증’ 또는 '러시아 혐오증'으로 번역되는 루소포비아는 핀란드와 러시아의 오래된 구원(舊怨)에서 비롯됐다. 핀란드는 1809년부터 1917년까지 108년간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틈타 독립했지만 이후 2차 세계대전 중 소련과 겨울 전쟁(1939~40), 계속 전쟁(1941~45)을 치르며 국토가 초토화됐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지난해 2월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핀란드의 트라우마를 깨웠다. 지난해 현지 매체 헬싱키 타임스는 “핀란드인 대다수는 러시아가 핀란드와도 전쟁을 일으킬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며 설문 조사 결과를 전했다. 매체에 따르면 조사 대상 절반 이상은 “러시아가 침공할까 봐 무섭다”고 응답했고, 5명 중 4명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핀란드에 확대하는 것이 두렵다”고 답했다.

핀란드는 지난해 5월 스웨덴과 함께 나토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고, 올해 4월 나토에 최종 가입됐다. 나토 가입 이후에 루소포비아가 더 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이번 국경 폐쇄 조치 후 “러시아의 새로운 표적은 적대적인 핀란드”란 제목의 기사에서 “나토 가입 후 핀란드는 러시아의 사이버 공격·난민 밀어내기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핀란드가 다음 목표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불렀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적대 국가' 된 핀란드…“과잉 반응” 지적도

핀란드 정보보안국(SUPO)은 러시아가 이미 핀란드를 적대국으로 간주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지난 10월 보도된 SUPO의 내부 보고서엔 “러시아는 핀란드에 대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조처를 할 준비가 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런 차원에서 핀란드는 러시아의 난민 밀어내기를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의 전초라고 인식한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전통적인 전쟁과 달리 가짜뉴스·소송전·선거 개입 등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타국을 교란하고 선동하는 방식이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는 “러시아가 핀란드에 난민을 보낸 건 하이브리드 전쟁의 일환”이라며 “하이브리드 전쟁에 능한 러시아는 중립을 깬 핀란드에 대한 저강도 보복 조치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핀란드 국경수비대가 북부 살라 국경 검문소에 도착한 이민자들의 서류를 확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핀란드 국경수비대가 북부 살라 국경 검문소에 도착한 이민자들의 서류를 확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다만 핀란드의 국경 폐쇄는 “과잉 반응”이란 지적도 나온다. 핀란드 동부대학 국경학 교수 유시 레인은 “러시아가 원하는 건 혼란과 공황이다”라며 “이것이 그들이 노린 것이라면, 핀란드의 국경 폐쇄는 (러시아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러시아의 크렘린궁의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핀란드의 국경 폐쇄 등에 대해 “루소포비아적인 입장에 유감”이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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