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초록색 은행 낙엽의 경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116년 만에 가장 더운 11월 초, 단풍 색깔 이변

최근 지구온도, 산업화 후 처음으로 2℃ 상승도

한국 탄소배출 세계 9위, 기후대응은 최하위권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는 전국이 단풍으로 물드는 시기다. 일조량이 줄고 기온이 내려가면 광합성을 담당하는 엽록소가 파괴돼 나뭇잎이 형형색색으로 변한다. 단풍이 절정에 달한 뒤엔 나무도 월동 준비에 들어간다. 잎에 있는 영양소와 수분을 빨아들여 겨우내 얼거나 죽지 않도록 채비를 한다. 이때 말라서 떨어진 나뭇잎이 낙엽이다.

그러나 올해는 유독 초록색 낙엽이 눈에 많이 띈다. 최근 배우 박진희가 수북이 쌓인 은행잎 사진을 SNS에 올리며 “이제 은행나무 낙엽이 노란색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온라인에선 “전주향교 등 은행나무 명소에 단풍이 들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했다”라거나 “떨어진 파란 낙엽을 보며 가슴까지 철렁 내려앉았다”는 식의 글이 잇따랐다.

기상청은 초록색 낙엽의 원인으로 11월 초의 기온이 116년 만에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뭇잎이 물드는 건 햇빛과 기온의 영향인데, 10월 말 한파가 닥친 후 갑자기 이상고온 현상을 보여 단풍이 물들 새도 없이 떨어졌다고 한다. 전국의 단풍 명소나 도시의 가로수 낙엽을 봐도 울긋불긋 향연이 예년 같지 않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원인은 기후위기 때문이다. 지난 21일(현지시간)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는 11월 17~18일 전 지구의 기온이 기상관측 이래 처음으로 산업화 이전(1850~1900년)보다 2℃를 넘었다고 발표했다.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국제사회는 기온 상승분을 산업화 이전보다 1.5℃ 이내로 억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이번에 임계치를 훌쩍 넘겼다. 현재 지구의 평균 기온은 1.2℃가량 상승한 상태다.

만일 2℃ 상승이 평균치로 굳어지면 인류에 엄청난 재앙이다. 2022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2℃ 상승시 플랑크톤이 감소해 수산자원의 17%가 줄고, 산호초의 99%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 세계적 폭염과 가뭄도 뉴 노멀이 된다. 3℃까지 오르면 지구 생물의 최대 54%가 멸종할 수 있다. 해수면도 올라가 해안가 도시가 물에 잠길 가능성이 커진다.

지금도 이미 이상고온 현상 탓에 생태계가 급변하고 있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해양 생물군은 북반구에서 10년당 30~55㎞씩 북쪽으로 이동 중이다. 특히 한반도 해역 수온은 지난 50년간 1.36℃나 올라 세계 평균치(0.52℃)의 두 배를 웃돌았다. 동해에선 특산품이던 오징어를 보기 힘들어졌고, 남해에선 멸치 어획량이 2020년 12만t에서 지난해 7만t으로 급감했다.

한국 정부는 기후위기에 안일한 모습이다. 종이컵과 같은 일회용품 금지 조치를 철회하는 등 환경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 지난 문재인 정부의 무분별한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이 논란이 됐지만 탄소중립이라는 방향만큼은 잘 잡았는데, 최근엔 그 취지마저 부정되는 듯한 인상도 준다. 국회에선 무탄소 에너지원인 소형모듈원자로(SMR) 연구 예산을 야당이 전액 삭감했는데, 이는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다.

한국은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 9위다. 하지만 기후 대응 순위는 탄소배출량의 90%를 차지하는 60개 국가 중 57위에 머물렀다.(뉴클라이밋연구소) 10위권 경제대국에 세계인을 매혹하는 K컬처로 문화강국 대열에 올랐지만, 국제사회에서의 책임만큼은 여전히 꼴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후부 장관까지 있는 독일·덴마크·스페인 등처럼은 아니어도, 달라진 국가 위상에 걸맞게 보다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