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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 주범' 찾기에 다시 떠오른 '그리드플레이션' 논쟁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한 슈퍼마켓에서 소비자가 채소 가격을 바라보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달 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한 슈퍼마켓에서 소비자가 채소 가격을 바라보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과 영국‧유로존 등 주요국이 인플레이션 ‘주범 찾기’에 나섰다. 기업이 고물가 분위기를 틈타 가격을 과도하게 올려 물가상승을 더욱 부채질했다는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탐욕 인플레이션)이 유력한 용의자다. 하지만 물가상승은 다른 구조적 요인에 기인했을 뿐 기업 이윤 추구 활동은 통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변론도 만만찮다.

20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영국과 유로존에선 그리드플레이션 논쟁을 다시 들여다보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올해 식료품 원자재 값이 내린 뒤에도 식품 기업들이 가격을 내리지 않고 폭리를 취했다는 주장 등이다. 20%대로 오른 파스타 물가가 밀 가격이 안정세를 찾은 뒤에도 떨어지지 않자, 지난 6월 이탈리아에선 '파스타 불매운동'이 거론되기도 했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유럽 인플레이션의 45%는 기업 이윤 추구 때문에 발생했다"고 봤다.

그리드플레이션을 공론화했던 이사벨라 베버 미 매사추세츠대 경제학 교수는 “비용 상승을 핑계로 기업들이 다 같이 과도하게 가격을 올리고 원자재 가격이 내려도 그대로 버티는 것”이라며 “코로나19 대유행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쇼크가 또 오면 기업들이 가격 인상에 나설 좋은 기회로 여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베버 교수는 석유‧가스 등 에너지 산업 이익이 다른 산업에 비해 늘어난 사실에 주목한다. 식품 산업 등 다른 산업 물가 전반에 영향을 미쳤을 거란 의미다.

그러나 기업 이윤이 가격 상승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와 러·우 전쟁으로 인해 공급망이 재편되고 노동시장이 타이트해지면서 생산비용이 오른 근본적 요인이 더 크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리드플레이션이란 표현 자체가 눈에 띄긴 하지만 분석적인 가치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며 “기업은 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격을 책정하기 마련”이라고 썼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그리드플레이션 주장에 따르면 민간기업의 순이익률이 최근 증가해야 하는데, 코로나19 대유행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영국 통계청 등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2분기(4~6월) 영국 비금융 민간기업 순이익률은 각각 10.7%‧9.6%를 기록했다. 영국 경제연구소 캐피털이코노믹스의 루스 그레고리 이코노미스트는 “기업들이 이윤을 키우고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한 것이 아니라, 기존 이윤 수준을 지키려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FT는 최근 연구를 종합해 두 주장 모두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고 봤다. ▶구조적인 수요-공급 불일치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가운데 ▶쉽게 가격을 올리기 쉬운 독점적 기업들이 이윤 확대에 나서면서 인플레이션 형성에 일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 상황은 그리드플레이션 논의에선 일부 비껴가 있다. 공급망 차질과 전쟁 등으로 인한 영향이 비교적 적어서다. 지난 8월 한국은행은 “지난해 한국의 물가 상승은 주로 수입물가 상승에 기인한 것”이라며 “수급불균형에 따른 가격 인상 폭이 유로 지역에 비해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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