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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해결자서 출제자로 변해야 ‘피크 코리아’ 불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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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호 16면

10개 ‘그랜드 퀘스트’ 도출한 이정동 서울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교수

“한국은 끝났다.” 13일 일본 경제지 ‘머니1’의 기사 제목이다. 신문은 이 기사에서 “한국 언론에서 중국 경제를 두고 ‘피크 차이나’라는 용어를 쓰며 중국의 경제 발전은 이제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한국은 다른 나라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한국 경제도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들어섰다는 ‘피크 코리아’론이다. 실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점진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1980년부터 2023년까지의 연도별 GDP 성장률 추이를 보면, 한때 13%를 넘겼던 한국의 GDP 성장률은 지난해 2.61%, 올해 1.40%까지 떨어진다. 향후 생산가능인구 감소와 맞물리며 ‘성장 내리막길’의 진행 속도가 가팔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장 밑거름 R&D 예산 줄이면 안 돼

책 『축적의 시간』과 『최초의 질문』으로 우리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져온 이정동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사진) 역시 “한국은 대전환의 국면에 있다”며 “지금이 마지막 불꽃이어선 안 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벤치마크할 선진국이 없어진 만큼 한국은 이제 ‘추격자’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난관을 극복하려면 (남이 제시한) 문제의 해결자에서, 문제 출제자로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 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며 “도전적 질문을 던지는 사회로 전환되면, 10년 내 기술선진국으로 더 굳건한 위상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세계적 수준의 싱크탱크를 목표로 지난해 2월 개원한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IFS)이 그 ‘최초의 질문’을 던지는 일에 나섰다. 지난해 여름이 시작이었다. 융합적 질문을 찾기 위해 분야마다 각기 다른 전공의 전문가가 2명씩 치열한 토의 끝에 10개의 분야에서 총 10개의 도전적 질문을 도출했고, 최근 이를 담아 『그랜드 퀘스트 2024』를 펴냈다. 이 프로젝트는 이 교수가 총괄 기획했다. 최근 이 교수를 만나 그랜드 퀘스트에 대해 물었다.

‘피크 코리아론’은 좀 충격이다.
“현재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찬란한 불꽃이라는 말이 정말 두렵다. 한국은 석유 한 방울이 안 나는데 우주 발사체를 만들고, 해양플랜트 기술이 있고, 자체 포털을 갖고 있으면서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신약을 개발하는 나라다. 미국을 제외하면 이렇게 폭넓은 산업 포트폴리오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서 찾기 어렵다. 지금껏 선진국을 추격하면서 눈물겹게 이 기반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제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선진 기업 수준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기 위해선 스스로 지도를 그리고 탐험을 시작해야 한다. 그랜드 퀘스트가 그 시작이다.”
도전적 질문이 왜 중요한가.
“1997년에 퀼컴의 최고경영자(CEO)가 휴대폰과 개인정보단말기(PDA)를 테이프로 묶은 다음 임원회의에서 ‘이런 걸 만들 수 있을까?’라고 최초의 질문을 던졌다. 이후 거듭된 좌절 끝에, 팜을 통해 처음 구현하게 된다. 이듬해 그 창업자는 최초의 스마트폰을 들고 해변에서 맛집을 검색해 스시바 목록이 뜨는 걸 보고, 이제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바로 퀼컴이 대박을 친 건 아니다. 결국 10년이란 스케일업 기간을 거쳐 2007년 스티븐 잡스가 아이폰을 공개하면서 본격적인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린다. 혁신적 기술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지만, 탄생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최초의 도전적 질문과 죽음의 계곡으로 불리는 치열한 스케일업(scale-up·능력 확대)을 넘어서야 한다.”

매년 혁신 질문·도전 과제 제시할 것

미래를 바꿀 10가지 질문

1 초미세·초저전력이며 아날로그 계산이 가능한 반도체를 만들 수 있나

2 한 번 충전에 1만㎞, 10년 가는 배터리를 만들 수 있나

3 인체 효소처럼 활성·선택성·안정성이 뛰어난 금속촉매를 만들 수 있나

4 변화된 환경을 인지하고, 이에 맞춰 행동하는 로봇을 만들 수 있나

5 인간의 뇌처럼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나

6 인과관계를 추론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나

7 인공지능을 학습시켜 암호화 된 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 수 있나

8 노화세포가 인체 조직에 노화를 전파하는 메커니즘을 제어할 수 있나

9 항체를 설계하고 생명체의 면역계를 이해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나

10 반도체 직접회로 기술로 신뢰할 만한 양자컴퓨팅 플랫폼을 만들 수 있나

10가지 질문은 실현 가능할까.
“이번 10개 그랜드 퀘스트는 모두 ‘발명’과 ‘혁신’ 사이에 있는 질문이다. 10년 목표로 도전할 문제들이다. 이 질문을 쫓다보면, 기초과학에서 필요한 연구주제도 식별되고, 산업계가 스케일업하기 위한 문제도 들여다볼 수 있다. 희미한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는다면 과학기술 뿐 아니라 글로벌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
산업계의 반응은.
“배터리, 수소, 노화 등 여러 과제에 관심이 컸다. 더 나아가 기업들이 ‘우리 회사 버전의 그랜드 퀘스트’를 만들어봐야겠다는 반응을 보였을 때 큰 보람을 느꼈다. 그럼에도 시행착오를 거치며 버전을 끊임없이 높여나가는 스케일업은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임원 혹은 대표라고 해도 임기가 짧고, 단기 성과를 내야하는 문화에서 스케일업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현실과의 괴리는 어떻게 좁히나.
“구글, 애플, 테슬라 등 패러다임을 선도하는 기업은 다 스케일업 전문 기업이다. 결국 우리 기업들도 이 길로 가야한다. 기존 비즈니스의 영향을 덜 받는 별도의 스케일업 조직을 갖춰 가면 좋겠다. 그러나 관건은 국가의 역할이다.”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코핀이라는 마이크로디스플레이 기술의 선도 기업이 있다. 그 시작은 1980년대다. 미국 국방부에서 ‘조종사들의 헬멧에 신호를 표시하는 기술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젊은 창업자가 이끄는 코핀이 해답을 제시했다. 물론 당시 디스플레이 수준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미 국방부는 이 초기 버전으로 납품을 받고, 다시 더 높은 기술을 요구한다. 그렇게 30년이 지나고, VR시대가 열리니 코핀이 해당 분야 글로벌 선두주자가 됐다. 아이폰의 인공지능(AI) ‘시리’의 탄생을 이끈 질문을 던진 것도 미국 국방부다. 정부가 이런 문제 출제자로 나서야 한다. 국가적 모래놀이터(sand box)를 조성하고, 실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됐다.
“금융위기 후 성장한 기업과 무너진 기업의 차이점을 살펴봤다. R&D를 꾸준히 한 곳은 성장했고, 상황이 좋을 때는 늘리고 나쁠 때는 확 줄인 곳은 꺾였다. 관건은 지속성이다. 이번 R&D 예산 삭감 논란이 뼈아픈 지점이 바로 여기다. 연구자들은 가뜩이나 불확실성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내년 내후년 프로젝트가 중단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장기적 연구 플랜을 가져가기 어렵다.”
기술주권의 새 판짜기가 치열하다. 한국이 앞서갈 수 있나.
“기술주권을 기술독립과 오인해선 안 된다.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로빈슨 크루소 같은 독자개발, 기술독립이라는 개념이다. 기술주권은 퍼즐 맞추기와 같다. 각국이 잘 할 수 있는 핵심기술이 다르다. 예를 들어 양자컴퓨팅의 경우 글로벌 유망 플랫폼이 많지만, 우리가 잘하는 반도체 집적회로 기술을 기반으로 양자컴퓨팅 분야에서 새로운 핵심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한국은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전방위적인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어, 국제적 지식의 네트워크를 연결할 경우 그랜드 퀘스트의 해답을 찾을 가능성이 그 어느 곳보다 크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은 산학협력은 물론 정부가 연구 방향을 참조할 수 있도록, 매해 혁신 질문을 발굴해서 도전 과제를 제시할 계획이다.”

그게 되겠어? 초미세·초저전력 반도체 등 도전 과제로 꼽아

그랜드 퀘스트 2024

그랜드 퀘스트 2024

이정동 교수는 혁신적 질문이 갖춰야 할 공통점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융합의 영역에서 새로운 질문의 싹을 틔워야 한다. 둘째, 한국의 강점을 잘 살려 해법을 구해 나갈 수 있는 것이며 셋째, 우연과 조우해 ‘가능성의 공간’을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를 열 ‘10가지 질문’은 그래서 난해하고 “그게 되겠어?”하는 의문이 들 법하다. 첫 질문은 초미세·초저전력 반도체 분야다. 공동저서 『그랜드 퀘스트 2024』에서 김장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현재의 반도체 소자와 제조기술에 기반하면서도 크기를 줄이고 전력을 적게 소모하는 반도체 개발 방법을 찾기 위해선 트랜지스터의 발열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전기차에 사용되는 이차전지 기술의 핵심 난제는 용량을 크게 하면서 수명을 늘리는 것이다. 강기석 재료공학부 교수는 “앞으로 우리가 만들고 싶은 배터리는 한 번 충전하면 1만㎞를 갈 수 있고, 또 10년을 사용할 수 있는 궁극의 배터리”라며 “10년을 쓰려면 1500회 이상의 충전과 방전이 가능해야 하며 작고 가벼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리튬산소 배터리와 같은 혁신적 개념이 가능할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과전압 발생 가능성 등 여러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수두룩하다.

항노화는 산업계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염원해온 주제다. 노화세포가 인체 각 조직에 노화를 전파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다면 노화와 관련된 많은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릴 것이다. 강찬희 생명과학부 교수는 “늙은 쥐에서 특정 노화세포를 제거했을 때, 늙은 쥐의 수명이 증가하고 노화 연관 질환이 감소했다”며 “노화 요소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회춘 요소를 적절하게, 그리고 복합적으로 사용한다면 보다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밖에도 효소 모방 촉매, 환경 적응적 로봇, 체화 인지 인공지능(AI), 추론하는 AI, 동형암호, AI 기반 항체 설계, 양자정보과학 등이 혁신을 위한 도전적 질문들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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