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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게릴라전 닮아 가는 여권의 선거 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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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물과 물고기의 관계. 마오쩌둥(毛澤東)이 했다는 이 말은 게릴라전의 핵심을 찌른다. 물자와 병력이 부족한 비정규군은 인민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후 급격한 태세 전환을 하는 정부·여당을 보면서 떠오른 단어가 게릴라전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은 무조건 옳다”며 참모와 각료들에게 ‘민심의 바다’로 뛰어들 것을 주문하고 있다. 부족한 의석수와 30%대에 머무르는 지지율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여권이 총선을 앞두고 쏟아내는 이런저런 정책들은 의표를 찌른다. 그러나 다른 말로 하면 느닷없고 뜬금없다. 시작은 김포의 서울 편입이었다. 주식 공매도 금지, 업소용 전기료 동결과 대용량 산업용 전기료 인상, 일회용품 규제 백지화, 대주주 주식양도세 기준 완화 등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연금 개혁이나 근로시간 개편 같은 골치 아픈 문제들은 국회나 경사노위로 슬쩍 넘겼다. 사이사이 간주곡처럼 탐욕스러운 기업과 은행 때리기로 박자를 맞췄다. 그야말로 게릴라전을 닮았다.

민심 명목으로 쏟아지는 정책들
변신보다는 급조·후퇴로 비쳐져
임기응변이 최종 승리 보장 못해
결국 비전·리더십으로 승부 내야

태세 전환의 속도와 내용이 어지럽다. 정부가 수행하던 ‘정규전’과는 180도 다르다. 환경이나 균형발전 등 우리 사회가 합의했던 미래 그림과도 모순된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가령, 윤석열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는 국토 균형발전이다. 지난 7월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가 출범했고, 9월에는 ‘지방시대 선포식’까지 열었다. 여당에서 김포 편입론이 나오고 사흘 뒤 윤 대통령은 대전에서 열린 ‘제1회 지방자치 및 균형발전의 날 행사’에 참석해 지역 교육과 의료를 강조했다. 그러나 김포의 그림자에 묻혀 대통령의 메시지는 존재감이 없어졌다.

불과 얼마 전 “공매도가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소리 높였던 금융위원장은 당과 용산의 채근에 입장을 바꿨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쯤이야 별거 아니라고 치자. 한국 경제의 ‘군사 교리’가 흔들리는 것이 진짜 문제다. 한국은 곡절이 있긴 했지만 시장경제라는 전투 지침에 따라 분투해 세계 10위권 경제를 일구었다. 선거철마다 이 지침이 요동치는 게 이제 당연해졌다. 대용량 산업용 전기료 외 인상 유보, 대주주 주식양도세 완화 등도 정공법을 벗어난 변칙 전술이다. 그 와중에 보인 사소한 작전 미스는 차라리 애교다. 카카오 갑질을 호소했던 택시운전기사가 대선 때 국민의힘 당직자였고, 은행 갑질에 눈물짓던 자영업자의 실체는 매출 100억원대 기업인이었다.

급조된 정책의 효과도 의심스럽다. 공매도 금지 다음 날 폭등했던 주가는 일일천하로 끝났고, 묘수로 여겼던 김포 편입은 다른 지역의 반발로 역효과를 걱정하게 생겼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대를 벗어날 기미가 없고, 여당 지지율도 제자리다. 그래도 뭔가 변하려는 노력, 민심 가까이 가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결과는 신통찮지만 노력은 가상하다고나 할까.

도덕 교과서처럼 총선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표를 얻어야 권력을 쟁취하는 정치제도에서 민심을 얻기 위한 정책은 불가피하다. 정책 전환이 필요하면 해야 하지만, 그에 이르기까지 고민의 과정을 보여주는 서사와 스토리텔링 또한 필요하다. 그런 전략과 노력이 없다면 유연한 변신이 아니라 무책임한 후퇴로 여겨질 뿐이다. 즉흥적이고 파편적인 정책은 어렵게 쌓아온 보수의 정체성마저 흔들 수 있다.

게릴라전은 분명 유용한 전술이지만 임기응변의 몇 개 전투가 전체 국면을 바꿀 수는 없다. 역사상 게릴라전이 효과를 거둔 전쟁이 몇몇 있지만, 최종 승리는 언제나 정규군의 몫이었다. 파리의 레지스탕스, 2차대전 때 이탈리아의 파르티잔은 훌륭하게 싸웠지만 연합군이 없었다면 의미 없는 희생에 그쳤을 것이다. 베트콩은 북베트남군이 밀고 내려와 승자로 남았고, 만주 유격대는 소련군의 힘으로 북한 장악에 성공했다. 앞으로 5개월 남은 총선이 게릴라전을 연상케 하는 무(無)맥락 정책 몇 개로 좌우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현재 여당의 모습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윤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 문법에 익숙지 않고, 인요한 혁신위원장도 정치 경험이 사실상 없다. 혁신의 목표가 뭔지도 분명치 않은 상황이다. 대통령 스스로 정치 초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문가나 경험자의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더 꼬일 가능성마저 있다. 지금 여권에서 전체 상황을 조망하며 그림을 그리는 전략가가 있는지 의문이다. 선거전이 파편적 게릴라전이 돼서는 승산이 없다.

본질은 정치 리더십의 혁신이다. 얄팍한 정책으로 본질을 가린다면 역풍이 불 가능성이 크다. 헨리 키신저는 베트남전쟁 중 “정규군은 이기지 못하면 지는 거고, 게릴라는 안 지면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저성장과 양극화 위기에 빠진 한국을 ‘안 지면 그만’이라는 자세의 리더십이 이끌어 간다면 서글프지 않은가. 승부는 미래 비전과 이에 어울리는 리더십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즉 ‘정규전’에서 결정된다. 여든, 야든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