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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엔저 정책이 부른 저성장 부메랑…일본, 3분기 -0.5% 역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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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달러당 엔화가 150엔 선을 넘나들며 엔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15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달러당 엔화가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달러당 엔화가 150엔 선을 넘나들며 엔저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15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달러당 엔화가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엔화가 심리적 저항선인 달러당 150엔 선을 넘나들자 일본은행(BOJ)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반면에 ‘엔저(低)=수출 악재’ 공식에 시달리던 한국은 과거보다 충격이 덜하다는 분석이다.

15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는 150엔대에서 거래됐다. 달러당 엔화 환율이 151.94엔을 넘을 경우 1990년 7월 이후 33년 만의 최고치(엔화 가치 하락)다.

이런 ‘수퍼 엔저’ 현상의 주된 원인으로는 미·일 금리 차가 꼽힌다. 값싼 엔화를 팔아 달러와 같은 고금리 통화를 사는 ‘엔 캐리 트레이드’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엔저를 더욱 부추기고 있어서다. 지난 9일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물가상승률 목표(2%)에 도달하기 위해선 갈 길이 멀다”며 매파적 발언을 내놓은 뒤 ‘엔 매도·달러 매입’ 기조는 더 강해졌다.

이 같은 엔저 현상은 일본 당국이 경기 침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통화완화 정책을 펼치면서 의도한 측면도 있다. 엔저를 앞세워 수출 경쟁력을 키운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고 임금을 올려 소비를 활성화해 경제성장을 이끌겠단 구상이다. 그러나 장기간의 경기 침체를 겪은 기업들이 수출 이익을 인건비나 투자금으로 쓰는 데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민간 소비가 활성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일각선 “일본, 통화정책 정상화 불가피”

장기적으로는 통화정책 정상화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BOJ는 지난달 “10년물 국채금리가 1%를 초과하더라도 일정 수준 허용하겠다”며 통화정책 정상화를 위한 출구전략에 들어갔지만, 기존 정책의 미세 조정에 불과했다.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지난 9일에도 “(통화정책 정상화를 결정하기엔) 아직 어느 정도 거리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경기회복세가 뚜렷해져야 통화정책 정상화에 나설 수 있다는 의미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일본은 BOJ의 통화정책 정상화에 앞서 재정 리스크도 살펴봐야 한다. 국채금리에 상한선을 그어놓고 국채를 사들이는 재정 운용으로 일본 정부 부채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00%를 훌쩍 초과한다. 세출의 30% 이상이 이자 등 국채 관련 비용으로 지출되는 상황에서 금리가 인상되면 이자비용이 많이 늘어날 수 있다.

수퍼 엔저는 일본의 성장률에도 부담을 주고 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속에 기록적인 엔저 추세가 이어지면서 수입물가가 급등하면서다. 15일 일본 내각부는 지난 7~9월 일본의 실질 GDP가 전 분기보다 0.5%(계절조정, 속보치)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시장 전망치인 -0.1%를 밑돈다. 이 추세가 1년간 이어진다고 가정해 계산하는 연간 환산(연율) 성장률은 -2.1%다. 일본 경제는 올해 들어 1분기(전 분기 대비 0.9%)와 2분기(1.1%)에 ‘깜짝 성장’했지만, 지난해 4분기(-0.1%) 이후 3분기 만에 다시 뒷걸음질쳤다.

과거 한국은 ‘엔저’에 덜덜 떨었다. 가장 대표적인 회사는 현대차였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시장에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앞세워 경쟁하는 상대가 일본 차라서다. 하지만 최근엔 얘기가 달라졌다. ‘100엔=1000원’ 공식이 깨진 지 1년이 넘었다. 100엔=800원대에 접어들었는데도 일본 차와 어깨를 견준다.

현대차·기아 베트남 판매량, 토요타 제쳐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15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현대차·기아는 지난달 미국 시장에서 12만5693대를 팔았다. 역대 최다 판매 실적이다. 토요타(19만5799대)에 밀렸지만 혼다(10만8088대)·스바루(5만3722대)·마쯔다(2만3504대) 같은 일본 차 브랜드를 여유 있게 제쳤다. 역시 치열한 경쟁 시장으로 꼽히는 베트남에선 올해 1~7월 5만2839대를 판매해 토요타(3만450대 판매)를 제쳤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현지 생산이 늘어난 데다 품질이 높아져 단순히 싼 가격으로 경쟁하지 않는 수준이 됐다”고 평가했다.

한국 수출기업은 엔화 가치 변화에 예민했다. 통상적으로 엔화 가치 하락→일본 수출상품 가격 경쟁력 상승→일본과 경쟁하는 국내 수출기업 악영향 구조라서다.

하지만 엔저 영향이 예전만 못하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무역협회는 지난 8월 발간한 ‘엔화 환율 변동이 우리 수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엔저만큼이나 ‘원저’도 심해 2012년을 기점으로 한·일 수출 경합도가 떨어지고 있다”며 “특히 주요 수출국인 중국·미국 시장에서 양국의 수출 경합도가 완화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한국 주력산업의 경쟁력이 일본과 비슷하거나, 웃도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가격 열세를 상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한국은 전자·반도체·조선 산업에서 이미 일본을 따돌렸고, 자동차는 턱밑까지 따라잡았다”며 “석유화학도 차별화에 성공해 일본과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는 구조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일본도 일면 인정하는 부분이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은 지난해 5월 ‘엔저는 한국에 더 이상 리스크가 아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의 영향력이 떨어진 가운데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독자적인 제품으로 세계시장을 개척했다. 현대차·기아도 더는 일본 차의 대체품 취급을 받는 처지가 아니다”고 분석했다.

물론 일본의 산업 경쟁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한국은 만성적인 대(對)일본 무역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올해 들어 9월까지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145억86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중국(157억500만 달러 적자)에 이어 2위다.

‘엔저 장기화’를 상수로 두고 주력 업종의 생산성을 올리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강내영 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엔저 장기화 추세에서 한국 주력 업종의 수출이 위축하지 않으려면 생산성을 더 높여 비교 우위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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