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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화가 박광수의 자연, 매혹적이면서도 위협적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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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하며 고향을 알고 나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내 화가 중에선 유영국(1916~2002)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한국의 자연을 아름다운 색채와 대담한 형태의 추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나중에 그의 고향이 경북 울진이라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감탄하며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백두대간의 깊고 긴 골짜기와 푸른 동해를 품은 울진을 아는 사람들에게 유영국의 그림은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울진의 계곡과 바다, 노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박광수, ‘옥수수의 기억’, 2023, 캔버스에 유채, 130.3x193.9㎝. [사진 학고재]

박광수, ‘옥수수의 기억’, 2023, 캔버스에 유채, 130.3x193.9㎝. [사진 학고재]

최근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개막한 박광수(39)의 전시를 보다가 화가의 고향 얘기를 듣고 고개를 다시 끄덕였습니다. 그의 고향이 강원도 철원이라는데, 아무리 보아도 이 화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철원의 자연인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욱 흥미로운 것은 유영국과 그의 그림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입니다.

유영국이 자연의 요소를 단순화하며 추상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박광수는 보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의 현란한 선과 화려한 색채로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담아냈습니다. 자연의 절제된 형상으로 부드럽고 조화로운 궁극의 평형 상태에 가 닿고자 하는 의지(유영국)의 대척점에서 박광수는 모든 게 엉켜있고 변화하며 움직이는 세계를 드러내 보입니다.

그의 캔버스엔 여백도 없습니다. 언뜻 보면 색채 추상화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숨은 그림’처럼 인간의 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수풀인가 하면 사람이고, 서로 뒤엉키며 웃자란 수풀은 사람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생명체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엔 붓이 지나간 흔적도 특이합니다. 유화로 그림을 그리지만, 그는 물감이 다 굳기 전에 자신이 직접 만든 붓(오일 스틱)으로 속도감 있게 선을 겹치며 그리는 식으로 불안하게 뻗어 나가는 생명력을 표현합니다. 그의 자연은 위협적이면서도 생동감 가득한 매혹적인 충돌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불가사의한 요소들이 매력으로 보인 것일까요. 미술계에선 그의 등장을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30대 후반인 화가는 2019년 학고재와 전속 계약을 맺고 이름을 알려 나가는 중인데,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이 개막 전에 모두 판매됐습니다. 이는 젊은 작가인 만큼 가격이 높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그동안 그의 작품을 눈여겨봐 온 이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마른 식물 타는 냄새가 나고” “논과 밭이 많았던 마을에서 자랐다”는 화가가 이렇게 우리에게 불쑥 다가왔습니다. 그를 키워낸 철원의 숲이 앞으로 그의 캔버스에 어떻게 펼쳐지고 확장해 나갈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