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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적은 일본 아닌 선조? 예술로 승화한 영웅의 고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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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호 18면

[비욘드 스테이지]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  

서울예술단 신작 ‘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무용극과 판소리, 뮤지컬, 미디어아트를 융합한 새로운 양식의 총체극으로 무대화했다. 26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사진 서울예술단]

서울예술단 신작 ‘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무용극과 판소리, 뮤지컬, 미디어아트를 융합한 새로운 양식의 총체극으로 무대화했다. 26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사진 서울예술단]

“네 이름은 나라의 신하 되어 사는 이름이다. 살아가라. 충신으로.”

이름부터 ‘신하’라는 뜻이 담긴 충무공 이순신에게 어머니 변씨 부인이 한 말이란다. 요즘 MZ세대라면 웬 꼰대같은 소리냐고 질색 하겠지만, 대의명분이 중요했던 아버지 세대만 해도 꽤 들었을 법한 얘기다. 하물며 ‘군사부일체’를 외쳤던 조선시대의 장수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텐데, 전쟁 영웅이라고 아무 고민 없이 나라에 목숨을 걸었을까. ‘난중일기’에는 전쟁 내내 이순신을 따라다닌 불안, 괴롭힘, 죄책감 같은 개인적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뮤지컬계 드림팀’ 한국적 가무극 만들어

8일 개막한 서울예술단 신작 ‘순신’은 여기에 천착했다. ‘난중일기’를 토대로 한 창작가무극인데, ‘충성스런 신하’라는 뜻의 이름을 그대로 내건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등의 명언이 지금까지도 패러디 되는, 우리 역사에 몇 안되는 영웅이지만,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레퍼토리화된 공연이 없었다. ‘순신’의 완성도가 궁금한 이유다. ‘명성황후’ ‘영웅’등 역사 뮤지컬이 장기인 제작사 에이콤도 내년 개막을 목표로 김훈 원작의 뮤지컬 ‘칼의 노래’를 개발 중이라고 하니, 두 공연의 대결구도가 흥미롭게 됐다.

같은 음악극이라도 서울예술단의 작품은 상업 뮤지컬과는 결이 다르다. 최근 ‘신과 함께’ ‘다윈영의 악의 기원’ 같은 창작뮤지컬로 인기를 끌었지만, 서울예술단은 원래 1988년 서울올림픽 문화 이벤트를 위해 만들어진 국립단체로, 뮤지컬배우 뿐 아니라 한국무용과 한국 타악 전문 단원을 두루 갖추고 한국적 정체성이 뚜렷한 가무극으로 출발했다. 2000년대 이후 국내 뮤지컬 산업의 성장과 함께 ‘바람의 나라’ ‘잃어버린 얼굴 1895’ ‘윤동주, 달을 쏘다’같은 대형 창작뮤지컬 개발에 힘써왔다면, 민간 제작사들이 수준급 창작뮤지컬을 쏟아내고 있는 지금은 뮤지컬과 차별화를 애써 모색하고 있는 국면이다.

서울예술단 신작 ‘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무용극과 판소리, 뮤지컬, 미디어아트를 융합한 새로운 양식의 총체극으로 무대화했다. 26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사진 서울예술단]

서울예술단 신작 ‘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무용극과 판소리, 뮤지컬, 미디어아트를 융합한 새로운 양식의 총체극으로 무대화했다. 26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사진 서울예술단]

‘순신’은 다시 ‘한국적 가무극’에 방점을 찍고 새로운 양식의 총체극 장르 개발을 야심차게 표방한 무대다. 창작판소리의 대명사 이자람에게 소리와 작창을 맡겨 중심을 세우고, 뮤지컬계 최고 창작진인 이지나 연출과 김문정 작곡가, 오필영 무대디자이너가 뭉쳤다. 뮤지컬 시장에서 최우선 순위인 흥행과 대중성을 잠시 잊고 국립단체에서 ‘제대로 예술 한번 해보자’고 나선 것. 한국무용가 정보경과 뮤지컬안무가 심새인까지 실험에 합류해 색다른 무대를 빚어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순신의 고뇌에 찬 꿈들을 축으로 놓고, 한산·명량·노량 대첩과 선조와의 갈등 같은 역사적 사실을 교차 편집한 형식이다. 무용수 형남희가 순신 역할을 소화하지만, 여느 무대처럼 주인공이 퍼포머가 아니라 창작자들의 예술적 개성이 주인공이 된다. 이순신의 꿈은 나레이션과 무용극으로 표현되고, 이자람의 판소리가 전쟁을 진두지휘하며, 아들 면과 가상의 인물 하연의 러브라인은 뮤지컬로 진행되는 식인데, 무용과 뮤지컬, 판소리, 무대미술까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평등하게 자기주장을 한다.

첫 번째 관전포인트는 ‘이순신 판소리’의 탄생이다. 판소리 소재의 뮤지컬 ‘서편제’로 창작뮤지컬에 새 장을 열었던 이지나·이자람 콤비의 또 다른 시도다. ‘삼국지 적벽가도 있는데 이순신 판소리가 없는 게 말이 되냐’는 이지나의 한탄에, 사천가·억척가 보유자 이자람이 적벽가를 레퍼런스 삼은 임진왜란 3대첩을 작창해 답했다. 총칼 들고 싸우는 사실적인 전투씬이 아니라 소리와 군무, 무대미술로 전쟁의 스펙터클을 이끌어낸 것. 예술성이 돋보이는 구성이었지만, 소리 자체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말맛과 리듬이 핵심인 판소리 사설의 문학성이 빛나는 부분은 많지 않았고, 급박한 전쟁 상황을 묘사하는 가사는 귀에 잘 꽂히지 않았다. 알아듣긴 힘들어도 호령하듯 노래하는 이자람의 포스가 전통 판소리 창법의 매력을 웅변할 뿐이었다.

서울예술단 신작 ‘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무용극과 판소리, 뮤지컬, 미디어아트를 융합한 새로운 양식의 총체극으로 무대화했다. 26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사진 서울예술단]

서울예술단 신작 ‘순신’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무용극과 판소리, 뮤지컬, 미디어아트를 융합한 새로운 양식의 총체극으로 무대화했다. 26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사진 서울예술단]

진짜 주인공은 비주얼이었다. 배우의 연기보다 조명의 타이밍이 중요하달까. 뮤지컬계 스타일리스트로 불리는 이지나 연출답게 무용과 조명, 영상의 조화가 압도적이었다. 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예지몽 장면에서 순신과 죽은 면이 추는 2인무는 케네스 맥밀란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웠다. 오필영 디자이너가 만든 해저터널 또는 군함 같은 무대세트는 그 자체가 스크린이 되어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가 되었다가 고뇌에 몸부림치는 이순신의 내면도 표현하는 미디어아트 수준이었다.

김문정이 작곡한 음악은 자칫 따로 놀기 쉬운 무용극과 뮤지컬, 판소리를 솜씨있게 엮어내 낯선 형식에 통일감을 부여했다. 김민기의 명곡 ‘상록수’를 모티브 삼은 넘버 등 감수성에 호소하는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과 시종 가슴이 웅장해지는 오케스트레이션에는 대중의 사랑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영화·드라마와 다른 ‘이순신 공연’ 탄생

다만 ‘이순신 드라마’에서 흔히 기대하는 스토리라인의 재미는 찾기 힘들다. 우리가 아는 용맹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도 없고, 일대기가 아니라 꿈과 내면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조차 꿈결처럼 표현했기에 기승전결도 없다. 이야기의 핵심은 왕과의 대결구도다. ‘순신’의 전쟁에서 적은 어쩌면 일본이 아니라 선조다. 선조실록에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모함하기까지 하며”라는 기록이 있듯, 비겁한 왕에게 전쟁영웅은 양날의 검이었던 것이다.

이지나 연출은 난중일기에서 이런 왕에게 충성해야 하는 시대를 살았던 개인 이순신의 고뇌를 발견한 것 같다. 전작인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호동’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자랑스러운 K영웅이라도 ‘국뽕’이 아닌 보편적 휴머니즘이 ‘K컬처’의 시대가 요구하는 감수성일 지 모른다. 드라이하게 쓰여진 난중일기에 첨단 무대언어와 대중적 음악, 전통의 코드까지 더해 감성에 호소하는 스타일리시한 예술로 승화시킨 총체극 양식도 서울예술단의 새로운 방향성으로 적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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