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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중 극단선택…법원 "검정고무신, 故이우영 작가에 돌려줘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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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검정고무신 : 즐거운 나의 집' 스틸컷

'극장판 검정고무신 : 즐거운 나의 집' 스틸컷

고(故) 이우영씨가 창작한 ‘검정 고무신’의 캐릭터 기영이·기철이 등을 활용할 권리가 유족의 품으로 돌아올 길이 열렸다.

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63부(재판장 박찬석)는 ‘검정 고무신’을 펴낸 형설앤 출판사가 이씨를 상대로 ‘2억8000만원을 물어내라’며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지만, 유족들의 계약 해지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다.

출판사가 ‘허락받지 않고 캐릭터를 상업적으로 활용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한 지 4년 만에 나온 결론이다. 법적 분쟁이 계속되는 스트레스 속에 이씨는 지난 3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법원은 이씨가 2007년 일체의 사업권을 출판사에 양도하기로 한 계약은 일단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아내인 이지현씨와 막내딸은 상속받은 범위 내에서 각각 4480만원과 2987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재판부는 “이씨가 제기하는 (출판사 측의) 신뢰 관계 위반을 이유로 한 계약 해지 주장을 인정한다”며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계약은 효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 앞으로 출판사는 캐릭터를 사용할 수 없고, 향후 캐릭터를 활용한 사업권은 유족들에게 넘어올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8월 18일 오후 서울 노원구 경춘선숲길갤러리에서 열린 이우영 작가 추모 특별기획전 '이우영 1972 - 2023 :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 개막식에서 이 작가의 아내 이지현 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월 18일 오후 서울 노원구 경춘선숲길갤러리에서 열린 이우영 작가 추모 특별기획전 '이우영 1972 - 2023 :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 개막식에서 이 작가의 아내 이지현 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형설 측과 이씨의 악연은 2007년 맺어졌다. 장진혁 형설퍼블리싱 대표가 이씨에게 ‘검정 고무신 캐릭터로 여러 사업을 벌이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제안해 둘은 사업권 양도 계약을 맺었다. 당시 계약서에는 ‘작품 활동과 사업에 대한 모든 계약권을 장씨에게 양도한다’, ‘이를 어기면 이씨가 계약금의 3배를 위약금으로 물어낸다’ 등의 조항이 담겼다.

이씨가 여기에 서명한 대가는 혹독했다. 이씨 측에 따르면, 이씨가 출판사로부터 정산받은 총액은 지난 15년간 1200만원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이씨는 생활고 끝에 검정 고무신 캐릭터를 자신의 개인 작품 활동에 사용했는데, 출판사는 이를 문제 삼고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무단으로 쓴 작품으로 거둔 부당 이익을 돌려달라’며 2019년 6월 수억원대 소송을 건 것이다.

쟁점과 증거를 정리하는 준비기일만 2년 넘게 걸렸고, 법관 정기인사로 한 차례 재판부까지 바뀌며 선고가 한없이 늘어졌다. 그 사이 고통을 받던 이씨는 지난 3월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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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의 쟁점은 ‘사적 자치 원칙에 따라, 불공정한 계약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는지’였다. 이날 선고 직후 이씨 측은 항소 계획을 밝혔다. 이씨 측은 “이번 판결은 ‘본인이 도장 찍은 계약서는 유효하다’는 대원칙하에서 나온 판결 같다”면서도 “그러나 갑을 관계에 놓인 창작자들에 대한 보호가 열악한 상황인 만큼, 원칙에 대한 예외를 인정해 계약 무효를 선언해 달라는 게 우리의 요구”라고 설명했다.

이씨 작고 뒤 소송을 이어받은 아내 이지현씨도 법정에서 기자들과 만나 “너무 떨리고 힘든 밤을 보내고 왔는데 아쉬움이 크다”며 “남편이 조금 더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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