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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이슈 될까"…검정고무신 비극 뒤엔 '구름빵법'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람이 죽어야 이슈가 될까”

지난 11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검정 고무신’의 원작 작가인 고(故) 이우영(향년 51세) 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 가끔 부인에게 했던 말이다. 이씨의 부인은 “남편이 최근 저작권 소송 문제로 힘들어했다”며 고인의 하소연을 전했다.

이씨는 2019년 6월 출판사 대표로부터 피소됐다. 만화 제작을 위해 손을 잡았던 장모(53)씨가 “이씨의 저작권 사용을 금지해 달라”며 민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장씨는 이씨 부모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검정 고무신 캐릭터를 사용한 것을 문제 삼아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1억원의 손해배상도 청구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즐거운 나의 집'의 한 장면. 뉴스1

극장판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즐거운 나의 집'의 한 장면. 뉴스1

전문가들은 ‘검정 고무신’의 사례처럼 원저작자가 정당한 보상은커녕 저작물까지 활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얘기한다. 범유경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변호사는 “현장에는 ‘검정 고무신’ 작가와 유사한 케이스가 많다”며 “출판사가 법률적 지식이 부족한 작가들을 상대로 지분까지 뺏어가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국회는 이미 8년 전 이 같은 문제를 알고 있었다. 2015년 4월 배재정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창작자가 유통업자 등에게 공정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신설하는 저작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구름빵 보호법’이라고 불렸다. 약 4400억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유아용 동화책 ‘구름빵’의 창작자가 저작권 명목으로 1850만 원밖에 보상받지 못했던 것을 계기로 발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소위에서 1번도 논의되지 못하고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이후 20대 국회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1건 발의됐지만 같은 이유로 폐기됐다.

유아용 동화책 구름빵

유아용 동화책 구름빵

21대 국회에서도 유사한 법안이 5건 발의됐다. 그 가운데 2020년 11월과 이듬해 1월 민주당 노웅래·도종환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한 법안은 도서를 포함한 모든 저작물에 대해 원저작자의 보상 청구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이들 법안 역시 상임위 법안소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법안을 발의한 한 의원실 관계자는 “출판계 반대가 워낙 강경해 진척이 더디다”며 “사회가 바뀌고 있는데 법이 속도를 못 쫓아가는 꼴”이라고 말했다.

창작자와 출판업계 간 최대 쟁점은 ‘투자의 위축 가능성’이다. 출판업계는 보상 청구권을 넓게 인정할 경우 인기가 높은 소수 창작자에게만 투자가 몰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창작자들은 현행 법체계에선 저작물이 크게 흥행하더라도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는 “논의가 많이 늦었지만, 업계 주장이 사실인지를 검증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시작했다”며 “빠르면 5월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 모습. 김상선 기자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 모습. 김상선 기자

지난 2월에서야 부랴부랴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공청회에서는 여야 모두 시급성을 강조했다. 문체위원들은 “늦은 감이 있다. 이런 내용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어야 했다”(김승수 국민의힘 의원), “제작 환경이 예전과 달라 저작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병훈 민주당 의원)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후 법안소위는 한 달이 넘도록 열리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2의 검정 고무신’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회가 빨리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김병인 한국시나리오 작가조합 대표는 “정당한 보상금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매우 많다”며 “시급하게 정당한 보상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규호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지적 재산권 자체를 보호하는 추세는 당연한 얘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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