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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이슈 될까" 검정고무신 작가 죽음 내몬 저작권 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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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검정고무신 원작 그림작가 이우영 씨가 남긴 미공개 원고의 일부. 이씨는 숨지기 전 저작권 소송에 대한 답답함을 만화를 그리며 달랬다고 한다. 사진 유족 제공

검정고무신 원작 그림작가 이우영 씨가 남긴 미공개 원고의 일부. 이씨는 숨지기 전 저작권 소송에 대한 답답함을 만화를 그리며 달랬다고 한다. 사진 유족 제공


“저들의 말처럼 다시는 기영이·기철이·땡구를 그리지 못할까봐…”

지난 11일 강화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검정고무신’의 원작 그림작가 고(故) 이우영(향년 51세)씨는 생전에 이런 내용이 담긴 그림을 그렸다. 검정고무신의 캐릭터 저작권을 두고 한 출판사와 소송을 벌이던 이씨가 답답함을 토로하는 차원에 홀로 그렸던 미공개 원고의 일부다. 지난 12일 빈소에서 만난 이씨의 부인은 “소송을 하면서 남편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술 한 모금 마시면 쓰러지던 사람이 어느 순간 술고래가 돼 있었다”며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사람이 죽어야 이슈가 될까’라는 말을 가끔 했다”고 전했다. 이씨는 결국 지난 9일 법원 변론기일에 출석한지 이틀 만에 싸늘한 주검이 됐다.

고 이우영 작가. 중앙포토

고 이우영 작가. 중앙포토

이씨는 2019년 6월 출판사 대표 장모(53)씨로부터 피소됐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2008년 손을 잡았던 장씨가 “이씨의 검정고무신 저작권 사용을 금지해달라”며 민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장씨가 검정고무신 주인공 ‘기영이’ 등 9개 캐릭터에 대한 저작권 지분 53%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허락을 맡아야 만화를 그릴 수 있다는 취지였다. 장씨는 “이씨가 무단으로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사용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1억원의 손해배상도 함께 청구했다.

원작자 아닌 장씨가 저작권을 가져간 건 계약 때문이다. 2007~2008년 3차례에 걸쳐 맺은 사업권 설정 계약서엔 “검정고무신에 대한 모든 사업에 대한 권리를 장씨에게 위임한다” “출판하고자 하는 책에 대해선 장씨가 우선권을 가진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특히 2008년 자신의 지분을 36%로 설정한 장씨는 2011년 검정고무신의 글 작가 이영일(65)씨의 지분 17%를 추가로 인수했다. 이씨는 미공개 원고에서 “이때부터 장씨는 마치 자신이 검정고무신을 만든 원작자인 양 행세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이씨 측은 “2015년 이후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 등에서 받은 돈은 수익의 약 0.5%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웹툰협회 법률 자문인 장철영 변호사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이 넘어가는 계약을 맺은 것”이라며 “지금도 (작가들이) 이렇게 계약서를 많이 쓴다. 협상력이 부족하면 서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씨 측에도 입장을 묻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신인 작가 대상 불공정 계약 관행…매절 계약도 횡행

 사진 '극장판 검정고무신 : 즐거운 나의 집' 스틸컷.

사진 '극장판 검정고무신 : 즐거운 나의 집' 스틸컷.

만화계에선 원작자에 불리한 저작권 계약이 관행처럼 자리잡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6년 차 웹툰 작가는 “저작권이라도 있으면 양호한 것”이라며 “출판사가 저작자에게 일정 금액만 지급하고 나면 향후 저작물 이용을 통해 얻는 수익을 모두 독점하는 ‘매절 계약’을 유도하는 회사도 많다”고 말했다. 권창호 웹툰협회 사무국장은 “매절 계약이 불법은 아니지만 저작권을 넘기는 만큼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지 않는다”며 “작가가 나중에 계약에 대해 항의하면 ‘유난 떨다 작업할 수 있겠냐’며 압박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웹툰 작가 실태조사 결과, 응답 작가의 21%는 연간 수입이 2000만원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8.2%는 1년에 1000만원도 벌지 못했다고 답했다. 데뷔 연차로 따지면 1~3년차에서 한 해에 1000만원도 벌지 못한다는 비율이 11.8%로 가장 높았다. 작가들은 경험해 본 불공정 계약으로 ‘2차적 저작권, 해외 판권 등 제작사에 유리한 일방적 계약’(23.2%), ‘매출 정산 내역 미제공’(17.5%) 등을 꼽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관련 단체, 전문가 업계 등과 함께 표준계약서 개정에 나섰지만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에서 웹툰작가 불공정계약 사례를 분석헤 온 범유경 변호사는 “2차 저작물에 대한 계약은 별도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이뤄지지 않는다. 명시적인 규정이 필요하다”며 “계약 시 플랫폼-제작사-작가 세 주체가 모여 공정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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