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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겨울 길목, 길고양이를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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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늦은 밤 창가에 서면 가로등 아래로 길고양이가 빠르게 지나간다. 밤엔 고양이가 주변과 색을 맞추는 보호색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고양이에게 선택당한 적이 있다. 오래전 정릉 암자에 들렀다가 숲에서 만난 새끼 고양이가 ‘습득이’었다. 집에 가라고 소리를 지르면 작은 관목 뒤에 숨었다가 다시 부스럭부스럭 따라왔다. 새끼 고양이는 어미에게 내쳐진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차에 태웠는데 피곤했는지 금방 잠이 들었다. 나는 길에서 주웠다고 장난스레 이름을 ‘습득이’로 지었다.

생각하니 나는 고양이에게 입양 당한 것 같다. 오자마자 녀석은 잘 먹고 잘 놀더니 나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제법 살이 올라 예뻐지면서 자신감이 붙었는지 야단을 치면 말대꾸를 했다. 습득이는 영리하고 깔끔하며 독립적인 고양이였다. 가끔 노트북 자판 위로 올라와 내 글이 마음에 안 들면 삭제하는 신공을 발휘했다. 글이 안 쓰이면 나는 장난감 낚싯대로 습득이와 놀았다. 역할을 바꿔가며 술래잡기를 했는데 내가 고양인지 고양이가 나인지 헛갈렸다.

오래전 정릉에서 만난 ‘습득이’
깊은 정 들었으나 저 세상으로
함께한 시간은 계속 남으리라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저녁 산책을 함께 다녀온 후 ‘습득이’는 바깥에 정신을 빼앗겼다. 위험하다고 해도 현관 앞에서 얼마나 울부짖는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한 시간 후에 돌아오라고 언질을 주었는데 정말 습득이가 돌아왔다. 우리는 매일 1층 현관 앞에서 극적인 상봉을 했다. 나는 두 팔을 벌렸고 습득이는 반짝 뛰어올라 품에 안겼다. 습득이는 동네에서 유명한 고양이가 되었다. 언젠가는 책을 읽다 깜박 마중 시간을 잊었는데 현관 자동문 앞에 앉아있다가 이웃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주민들은 누구나 습득이를 알아보았다. “집에 가니?”

어느 날 습득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을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고양이를 찾는 전단을 붙였다. 가출한 고양이를 찾는 ‘고양이 탐정’ 업체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나는 모든 일을 작파하고 고양이를 찾으러 다녔는데 눈치 없는 이웃이 습득이가 분실이가 됐다고 농담을 했다. 자식을 잃은 것만 같은 내게 그게 할 소리냐고 따지려다 외면했다. 정이 그렇게 무서웠다.

사흘째 되던 밤은 가랑비가 내려서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다시 아파트를 나섰는데 비쩍 말라서 눈빛만 살아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내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습득이를 다시 ‘습득’하고 울면서 욕설을 퍼부었는데 졸지에 고양이는 강아지가 되었다. 다음날도 습득이는 현관 앞에서 울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자 창틀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습득이의 등에 얼굴을 대고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날이 따뜻해지면 네가 살던 정릉에 가보자.” 심심해진 습득이는 내 노트북 자판에 올라가 사뿐거리며 알 수 없는 문장을 쓰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 고양이의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자꾸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병원에서 신장염이란 진단을 받았다. 습득이는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며 투병했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전화였다. 습득이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양이도 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는 작별 인사를 했다.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웠고 행복했다. 사람이 죽으면 자기와 살았던 동물이 마중 나온다는데 그때 네가 나온다면 나는 참 행복할 것 같구나.”

그날 정릉 숲속에서 새끼 고양이를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다. 사람처럼 동물도 인연인지라 이별은 사랑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가슴 속에서 습득이를 보내지 못한 탓인지 꿈을 자주 꾸었다. 어느 날 새벽에 중국 고승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절에 새끼 고양이가 나타나자, 동서로 나뉜 스님들이 서로 키우겠다고 다툼을 벌인다.

주지 남천 선사가 풀을 베던 낫을 고양이의 목에 대고 학승들에게 말했다. “고양이를 두고 왜 다투는지 말하라. 이치에 맞으면 고양이의 목숨을 구해주고 맞지 않으면 고양이를 베겠다.” 모두 머뭇거리자 남천은 가차 없이 고양이의 목을 베었다. 저녁에 수제자 조주가 돌아오자 주지는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조주는 머리에 신발을 얹고 절을 떠나버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 나는 조주가 절을 떠난 이유를 이해할 것 같다. 부처를 보면 부처를 베고 조사를 보면 조사를 베라는 ‘살불살조’를 스승이 행했다면 주조에게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였다. 엄격한 가르침에 제자는 유연했다. 고양이 목을 벤들 고양이의 아름다움이 어디 가겠는가. 내가 습득이와 함께했던 시간이 사라지겠는가. 나는 머리에 신발을 얹는 대신 캣맘이 되었다. 밥을 먹던 고양이가 보이지 않으면 영역이나 서열에서 밀려났거나 수명을 다했을 거라 짐작했다. 생태계의 질서라지만 그래도 가슴이 서늘했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는 다시 창밖을 본다. 혹독한 겨울이 오고 있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