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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 먹고 싶다면 연락주세요"…기피 과 '전공의 모시기'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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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10월 31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제중관 외과 의국 출입문에 내년 외과 전공의 모집 포스터가 붙어 있다. 사진 의협신문 제공

지난 10월 31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제중관 외과 의국 출입문에 내년 외과 전공의 모집 포스터가 붙어 있다. 사진 의협신문 제공

“외과,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가오(자존심이나 체면을 속되게 이르는 말)야.”
최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외과 의국(의사가 모이는 방) 출입문에 붙은 문구다. ‘2024 외과 신입 전공의 모집’ 포스터에 수술 모와 수술용 장갑, 마스크를 착용한 의사의 모습과 함께 문구가 적혀 있다.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라는 신조어를 응용해 위험한 수술을 담당하는 외과 의사의 자존심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명문 병원 외과 의국의 자존심이 상처받은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올해 전공의 모집 때 이 병원 외과는 모집 정원 15명에 9명이 지원해 0.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병원 관계자는 “기피 과에 대한 전공의 미달 사태가 잇따르면서 모집에 대한 절박한 마음이 (포스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0명 지원’ 막아라…필수의료 중심으로 씁쓸한 홍보전

‘빅5’를 포함한 수련병원들이 이달 말 진행되는 전공의 모집을 위해 홍보전을 펼치고 있다. 재기발랄한 유행어를 패러디한 포스터, MZ 세대(20~30대) 전공의를 겨냥한 SNS 영상물 등이 대표적이다. ‘기피 현상’이 두드러지는 필수의료 과목 위주로 홍보가 활발하게 진행된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한국 필수의료 붕괴의 현실이 느껴진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지난 1일 공식 유튜브에 ‘산부인과 전공의 생활’이라는 제목의 산부인과 전공의 브이로그 동영상을 올렸다. 산부인과는 ▶낮은 수가 ▶소송 위험 ▶저출산 등으로 소아청소년과와 함께 대표적인 기피 과로 꼽힌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이 보건복지부에서 받은 ‘전공의 지원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율은 78%(187명 모집에 145명 지원)였다. 세브란스병원도 올해 정원 10명에 4명이 지원해 정원 미달(경쟁률 0.4대1)이었다. 해당 영상에서는 “수술과 내과적 치료를 모두 배울 수 있다”는 산부인과의 장점이 언급됐다.

최근 올라온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홍보 영상. 소청과 장점이 언급됐다. 사진 삼성서울병원 유튜브 캡처

최근 올라온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홍보 영상. 소청과 장점이 언급됐다. 사진 삼성서울병원 유튜브 캡처

삼성서울병원은 최근 ‘전지적 전공의 시점. feat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채용 홍보’라는 영상을 유튜브에 게재했다. 소청과 1년 차 전공의 3명과 교수 등이 나와 “뜻깊고 가치 있는 일을 한다”며 일에 대한 자부심을 소개했다. 올해 이 병원 전공의 모집에서 소청과는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정원 6명에 5명이 지원했다. 올해 소청과 전공의 지원율은 25%(208명 모집에 53명 지원)에 그쳤다.

서울아산병원은 최근 “세상의 모든 중환(중환자)은 여기로 온다.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는 내용이 담긴 응급의학과 신입 전공의 모집 글을 올렸다. 올해 응급의학과 지원율은 86%(정원 190명에 지원 163명)다.

“전공의 채우려 ‘온몸 비틀기’”

세브란스병원 유튜브에 올라온 산부인과 전공의 브이로그 영상. 사진 세브란스병원 유튜브 캡처

세브란스병원 유튜브에 올라온 산부인과 전공의 브이로그 영상. 사진 세브란스병원 유튜브 캡처

의료계에선 “빅5가 이 정도인데 다른 병원 기피 과는 어떻겠냐”는 탄식이 쏟아진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인기과는 홍보를 안 해도 알아서 지원하지만, 비인기과는 어떻게든 (인턴을) 모집하려 ‘온몸 비틀기’를 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공의 근무 날을 줄여주는 대신 교수나 촉탁의 근무일을 늘리면서까지 모두가 희생한다. 이게 응급의학과 트렌드”라고 씁쓸해했다.

필수의료 과목 전공의 지원율이 수도권보다 떨어지는 비수도권은 더 절박한 분위기다. 대구 계명대 동산병원은 필수의료 전공의에게 수련보조수당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경북대병원 산부인과는 1년 중 15일(평일 기준) 휴가와 평일 24시간 당직 후 24시간 ‘오프(휴일)’를 보장하고 나섰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복지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흉부외과·소아청소년과·응급의학과·산부인과·외과 등 비인기 필수과목의 비수도권 지원율은 2014년 71.8%에서 올해 45.5%로 26.3%포인트 하락했다. 경북 내 한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한 30대 의사는 “인기과로 가거나 자교 병원에서 특혜를 주지 않는 이상 지역 의대 출신이라도 서울 쪽으로 수련병원을 찾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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