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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건전재정 공감 끌어낼 ‘스토리텔링’ 고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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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재정 포퓰리즘’ 극복에 힘 실리려면

장덕진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장덕진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세 번째 국회 시정연설을 마쳤다. 대통령의 달라진 태도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만하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소감을 말하자면 방향은 맞지만 줄거리가 약하다는 것이다. 연설을 듣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정부가 뭘 하겠다는 건지는 알겠는데 왜 그렇게 하겠다는 건지 공감하기는 어렵다.

예산안에 대한 대통령의 설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에서 예산안 편성의 원칙을 설명하고 뒤에서 항목들을 나열했다. 원칙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재정운용 기조는 건전재정이다. 물가안정, 국가신인도, 미래 세대의 부담 경감에 기여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이나 신용평가사들도 이 방향이 옳다고 호평했다.” 재정을 써야 할 항목들을 “국방, 법치, 교육, 보건 등 국가 본질 기능의 강화와 약자 보호, 그리고 미래 성장동력 확보”라고 요약했다. 뭔지는 알겠다. 그런데 국민들이 왜 이것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적극 동참해야 하는지 동기부여는 되지 않는다. 스토리가 없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 예산안 시정연설
방향은 옳지만 줄거리 약해

무엇을 아끼고 어떤 데는 쓸지
국민의 이해와 동감 더 구해야

재정 유혹 이겨 내겠다는 결의
총선·대선에서 지켜낼지 관심

남유럽 닮아가는 한국

지난달 31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건전재정과 물가안정, 연금개혁 등을 강조했다. 김현동 기자

지난달 31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건전재정과 물가안정, 연금개혁 등을 강조했다. 김현동 기자

한국은 남유럽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예측 가능했던 일이다. 전쟁과 같은 외부 변수를 논외로 할 때, 결국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축은 두 개다. 하나는 재정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의 합리성이다. 재정을 아낀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쓸 때는 써야 한다. 하지만 돈을 쓰려면 정책이 그만큼 합리적이어야 한다. 꼭 필요한 곳에 써야하고, 지속 가능해야 하고, 길게 보면 쓴 것보다 더 많은 돈이 세금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한국이 그동안 버텨온 데에는 설사 정책의 수준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악착같이 재정을 아껴온 덕이 크다.

헛돈을 쓰더라도 소액만 썼으니 망할 일은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GDP 대비 복지지출은 아직도 OECD 꼴찌에서 네 번째라고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증가속도는 OECD에서 가장 빨랐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은 장래에 OECD 평균에 근접해 갈 것이다. 여기에 고령화 변수가 더해진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로 세금 낼 사람은 빠르게 줄어들고 세금의 혜택을 봐야 할 사람은 빠르게 늘어난다. 복지지출의 가장 큰 부분이 연금과 의료인데, 둘 다 노년기에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초고령사회의 아킬레스건이다.

한국의 재정은 설사 지금은 건전해 보이더라도 고령화 속도와 맞물려서 빠른 속도로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며칠 전 중앙일보가 보도한 것처럼 ‘숨만 쉬어도 나가는’ 복지지출이 윤석열 정부 임기 말이 되면 연간 24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선거 전략이 된 재정 풀기

게다가 야당은 재정을 푸는 것을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 전략으로 적극 활용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국가 부채를 두 배 가까이 늘려놓는 큰 정부를 경험해 보았고, 기본소득으로 요약되는 재정 풀기 전략이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0.73% 포인트 차이라는 박빙의 대선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경험해 보았다. 다음 야당의 대선후보는 누가 되더라도 큰 정부를 지향하고 재정적자를 늘리는 쪽으로 전략을 세울 가능성이 크다.

재정지출을 늘리려면 정책이 합리적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갈수록 극단적인 편 가르기와 포퓰리즘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이어서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니 한국은 남유럽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도무지 이 정책을 왜 하는지 알 수 없는 카오스 속에서 재정은 펑펑 쓰는 모델 말이다.

무능 정치와 방만 재정이 결합하면

남유럽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그리스다. 우리 경제의 개방성이 그리스보다 훨씬 높고 제조업 강국이라는 것이 큰 차이점이지만, 정치의 무능과 방만 재정의 유혹이라는 점에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스가 EU에 가입하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리스 경제는 건실했었다. 한국에서 거대 양당이 번갈아 집권하듯이 그리스에서도 진보성향 사회당과 보수성향 신민당이 오랫동안 번갈아 집권해왔다. 한국이 그랬듯이 그리스도 60~70년대 군부에 의한 권위주의 통치를 경험했다.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영향이 컸듯이 그리스의 사회당도 비슷한 역할을 했고, 민주화 이후 번갈아 집권하는 거대 양당 중 하나가 되었다.

양대 정당의 경쟁에서 핵심적인 도구는 불행히도 재정이었다. 80년대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재정적자를 늘렸고, 90년대 초반 보수성향 신민당이 정권을 잡자 조금이나마 재정적자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미 공짜 복지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복지를 줄이는 정책이 인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신민당은 불과 4년 만인 1993년에 다시 정권을 내주었고, 사회당은 다시 해마다 재정적자를 점점 늘려가며 11년을 집권했다.

2004년이 되어서야 다시 정권을 잡은 신민당은 11년 전 선거 패배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을 잊지 않았다. 보수 정당이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사회당보다도 더 큰 규모로 재정을 퍼주기 시작했다. 결국 그리스는 방만한 재정 운용과 누적된 정부부채에 2007~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외부 변수가 닥치자 순식간에 무너졌다. 10여 년간 고통스런 구조조정 끝에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긴축재정은 최소 20년은 더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망이다.

사람 5명에 샌드위치는 20개?

반복된 퍼주기의 결과 그리스의 공기업 근로자 규모는 OECD 평균의 세 배에 달했다. 소위 공공부문 일자리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자. 필자는 유로존 위기가 한창일 때 그리스를 방문해 복지부 차관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오후 3시 경이었고, 그리스 쪽에서 차관과 배석자 한 명, 우리 쪽에서 연구자 세 명, 합쳐서 다섯 명이었다. 누군가 노크를 하더니 간식으로 차와 샌드위치가 나왔다. 샌드위치가 무척 맛있기는 했는데, 사람이 5명인데 샌드위치는 20개도 넘어 보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오후 간식을 이렇게나 많이 먹나?” 궁금했지만 경제위기 속에 자기 나라의 정책을 열심히 설명하는 차관에게 차마 그런 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아테네 대학 교수와 식사 자리에서 결국 궁금증을 풀었다. 필자의 질문에 한참을 웃다가 그가 내놓은 설명은 이랬다. 그리스는 공공부문이 과대 팽창되어 있고 샌드위치를 가져온 사람은 복지부에서 근무하는 공공부문 근로자일 것이다. 경제위기로 인해 트로이카(IMF, EU, 유럽중앙은행 등 3대 채권자) 주도하에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데, 그 사람은 잘리지 않으려면 자기가 꼭 필요한 인력이라는 점을 입증해야 하고, 그러려면 샌드위치 제조 실적이 많아야 한다. 그러니 사람이 다섯이면 샌드위치는 20개가 나온다는 것이다. 재정 풀기 경쟁이 어떻게 나라를 망하게 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다.

정책의 스토리를 국민과 공유해야

총선이 코앞인데 강서구청장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여당의 총선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국민의힘은 그리스 신민당과는 달리 퍼주기의 유혹을 견뎌낼 수 있을까. 설사 이번에 견딘다 하더라도 만약 총선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대통령의 힘이 절반 이상 빠진 상태에서 차기 대선이 다가온다면 그때에도 유혹을 견딜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는 그리스 사회당처럼 겁 없이 재정적자를 늘려놓았다. 윤석열 정부는 2004년의 그리스 신민당과는 달리 인기가 없더라도 옳은 길을 갈 수 있을까.

그러려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래서 우리가 꼭 해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설사 인기가 없더라도 그 일을 꼭 해내기 위해 어떤 결의를 가지고 있는지, 그 스토리를 국민과 공유해야 한다. 대통령이 무엇을 자신의 역사적 소명이라고 인식하고 있는지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내려가봤자 30%이고 올라가봤자 45%이다. 현재의 양극화된 정치 지형에서는 벗어나기 힘든 계곡 같은 것이다. 지지율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뚝심 있게 할테니 지지해달라고 해야 지형이 바뀐다. 야당을 향해 자세를 낮추어도 좋다. 해야 할 일을 하면 저절로 격이 생긴다. 전 정부와 비교하지 않아도 좋다. 해야 할 일을 하면 국민들은 알아서 비교할 것이다. 그것이 원래 국민들이 윤석열 후보에게 기대했던 것이기도 하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