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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파인이에요, 앤드 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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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한바탕 웃고 나니 씁쓸했다. 희대의 사기 행각 정황이 줄줄이 나오는 전청조씨 이야기다. 그가 이웃에게 보냈다는 “I am 신뢰에요” “Next time에 놀러 갈게요”라는, 영어인 듯 영어 아닌 메시지는 올 가을 유행어로 등극했다. 최저 월세가가 2000만원이라는 고급 주거단지의 다른 주민에게 보낸 메시지를, 영어를 섞은 서툰 한국어로 적은 이유는 자명하다. 재벌가 교포 흉내를 내면 남을 속이는 일이 쉬워진다는 판단일 것이다. 21세기 하고도 23년의 연말인 지금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영어와 교포라는 존재에 약하다는 방증 아닐까.

전청조씨가 보냈다는 메시지들. [JTBC 캡처]

전청조씨가 보냈다는 메시지들. [JTBC 캡처]

전청조뿐인가. 절찬리 방영 중인 JTBC ‘힘쎈 여자 강남순’에서도 마약 조직에 들어간 주인공이 “영어 이름을 만들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렇게 ‘남순’이 ‘힐러리’가 되는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코믹 캐릭터 이름은 ‘브레드(Bread)’. 브래드(Brad)도 아니고, ‘빵씨’라니. 이 역시 우리 사회가 교포와 영어에 약하다는 점에 착안한 유머 코드다. 10년 전, 한 공기업이 한국 식재료의 우수성을 홍보하겠다며 ‘낭만적 버섯(romantic mushroom)’ ‘엄청난 미역(fabulous seaweed)’이란 콩글리시를 뉴욕 버스 광고에 썼던 해프닝도 떠오른다. 바로 지난주엔 서울 광화문 인근을 지나가다 대기업 계열사가 경영하는 어느 카페에 걸린 ‘육감적인 커피(sensuous coffee)’라는 영어 홍보 문구에 흠칫했던 기억도 새롭다. 육감적 커피라니, 궁금하긴 하다. 고도의 마케팅 전략인 걸까.

지금은 “하우 아 유?”에 “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 식으로 영어를 배우는 때도 아니고, 외려 오대양 육대주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공부하는 시대다. 통번역기가 언어 장벽을 무너뜨릴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시대에 왜 아직도 우린 영어와 교포 앞에서 작아지는 걸까. 그러고 보면, 영어신문 기자 시절 “미국 어디에서 살다 오셨어요?”라는 질문에 “토종인데요”라고 답하면 실망과 의구심이 섞인 반응이 나오곤 했다. 교포가 아니므로 “You are not 신뢰에요”라는 듯. 반대로, 올해 뉴욕타임스(NYT)의 에디터가 칼럼을 제안해왔을 때 “나 한국 토종인데 괜찮냐”고 묻자 그의 답은 이랬다. “신뢰가 더 가는 걸?”

영어, 외국인(정확히 말해서는 코카서스 인종), 그리고 교포에 대한 낡은 선망은 2023년도 저물어가는 이 시점엔 버려도 좋지 아니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써본다. “Next time의 전청조는 없었으면 해요,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