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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여성 찍는게 사명" 부친 넘어선 딸, 코폴라의 고백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소피아 코폴라 감독.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소피아 코폴라 감독. 로이터=연합뉴스

여성의, 여성에 의한, 그러나 남녀 모두를 위한 영화. 소피아 코폴라(52) 감독이 만드는 영화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대표작 '마리 앙투아네트'부터 최신작 '프리실라'까지, 그는 역사의 이면에 가려진 실존 여성을 재조명하는데 집중해왔다. 여론이 손쉽게 단죄하고 정의했던 여성을 다시 파고들어 그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식이다. 그는 뉴욕타임스(NYT) 지난 27일(현지시간)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야 마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신작 '프리실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부인, 프리실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파고든다. '로큰롤의 황제'의 신데렐라가 되어 딸을 낳았지만 이혼한 프리실라 프레슬리 이야기다. 프리실라 프레슬리는 이 영화가 공개된 지난달 베니스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사람들은 내가 14살 때 엘비스와 만나 그때부터 육체관계를 맺었을 거라고들 떠들었지만 그런 적 없다"며 "그의 삶의 방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지만, 이별 후에도 우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코폴라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도 주인공을 사치와 향락으로 부르봉 왕가를 망친 여성이 아니라, 홀로 이국에서 믿을 이 하나 없이 아들을 낳아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 10대 소녀의 서사를 그린 것과 같은 결이다.

소피아 코폴라(왼쪽) 감독과 함께 지난달 베니스영화제 참석한 프리실라 프레슬리(오른쪽). AFP=연합뉴스

소피아 코폴라(왼쪽) 감독과 함께 지난달 베니스영화제 참석한 프리실라 프레슬리(오른쪽). AFP=연합뉴스

올해는 소피아 코폴라에게 기념비적인 해다.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2003년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원제: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이후 20년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그의 영화 궤적을 담은 책, 『소피아 코폴라 아카이브』도 최근 펴냈다. 젊은 여성 영화인에게 소피아 코폴라는 동경의 이름이 됐지만, 여전히 그는 고민이 많다고 출판 기념회에서 털어놨다. 영화인을 꿈꾸는 이들은 그에게 "영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등 질문을 쏟아냈지만, 그는 예산 확보의 어려움 등 현실적 이야기를 주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출판 기념회 이후 NYT와 만난 그는 "사실 '프리실라' 촬영 막바지에 예산이 삭감됐고, 그에 적응해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영화 '프리실라'의 한 장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 부인,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삶을 다뤘다. AP=연합뉴스

영화 '프리실라'의 한 장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 부인,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삶을 다뤘다. AP=연합뉴스

소피아 코폴라가 처음부터 소피아 코폴라였던 것은 아니다. 데뷔 당시엔 영화계 거장인 아버지 프란시스 코폴라의 딸로 소개되곤 했다. 아버지 덕에 어렵지 않게 영화계에 입문한 '할리우드 금수저'로도 통했다. 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의 영화 '대부 3'(1990)에선 연기자로 출연했다 혹평을 받았다. 그에겐 카메라 앞이 아닌 카메라 뒤에 서는 게 적성이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쉽게 기회를 얻으리라는 세간의 추측이 그에겐 힘들었다고 한다. NYT는 "소피아 코폴라에 성공하는 것은 쉬웠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전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아버지, 영화 '대부' 시리즈의 거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지난해 2월 사진이다. AFP=연합뉴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아버지, 영화 '대부' 시리즈의 거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지난해 2월 사진이다. AFP=연합뉴스

대표적 사례가 그의 첫 본격 상업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원제: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였다. 그는 각본을 쓸 때부터 배우 빌 머레이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그러나 머레이는 출연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코폴라는 읍소하는 편지를 머레이에게 쓰고,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라는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터뜨렸다고 고백한다.

결국 곡절 끝에 머레이는 출연에 응했고, 영화는 또 다른 코폴라 감독의 존재를 각인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듬해 이 영화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손에 쥐었다. 2010년엔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그는 더이상 출연 읍소 편지는 쓰지 않는다. 이제 '코폴라'라고 하면 소피아를 떠올리는 이가 30대 이하에선 더 많을 정도다. NYT는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여러 명의 젊은 여성 팬들이 다가와 '등대가 되어 주어 감사하다'는 식의 인사를 전하더라"며 "소피아 코폴라는 '아직도 이런 말엔 적응이 안 된다'고 멋쩍어했다"고 전했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2003년 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중 한 장면. 오른쪽이 빌 머레이다. [중앙포토]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2003년 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중 한 장면. 오른쪽이 빌 머레이다. [중앙포토]

그를 여전히 괴롭히는 건 돈이다. 그는 NYT에 "영화 제작비와 예산을 결정하는 핵심 주체는 여전히 백인 남성인 경우가 많다"며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성 영화인들에겐 여전히 문이 좁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젊은 여성 영화인들이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소피아 코폴라라는 개척자가 있는 건 여성 후배들에겐 위안이다. NYT는 소피아 코폴라와 함께 최근 '바비'로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그레타 거윅 등이 30대부터 두각을 드러내며 젊은 여성 감독의 계보를 형성해왔다고 적었다. 코폴라는 NYT에 "원래는 상업 영화를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쩌다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낼 때까지 해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그 꿈은 계속 자기의 마음속에 남아 자신을 괴롭힐 테니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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