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기자들(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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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기자들이 옆에 있던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기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좀 만나도 되겠소?』 안내원은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지난 9월 남북회담 때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 묵었던 북한 기자들의 얘기다. 그때가 오전 10시쯤이었다.
북한 기자들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더니 「저기 벤치」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필경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우리측이 미리 배치한 요원쯤으로 짐작하고 딴전을 부려 보인 것이다.
마침 길을 가고 있던 반백의 노인을 붙들고 말을 걸었다.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남북통일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첫 질문을 던졌다. 그 노인은 서슴지 않고 『거야 당신들 하기 달렸지,왜 나한테 묻소』하고 오히려 반문했다.
이번엔 백화점 쪽으로 가고 있던 부인을 가로막았다. 대뜸 던진 질문은 임수경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참 예쁘고 귀엽게 생겼어요. 그런데 북한에선 그 쪽 여자대학생이 몰래 서울에 다녀가도 혼내지 않고 가만히 있나요』하고 역시 반문했다.
궁금한 것은 북한 기자들이 어디에다 그런 얘기를 썼는지 모르겠다. 그 무렵 북한 신문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런 보도는 없었다.
요즘 남북회담을 취재하려고 서울에 온 북한 기자들은 우리측의 안내도 없이 서울시내를 마음놓고 휘젓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외국어대학을 찾아가서는 『비핵,군축,미군철수가 통일의 선결조건임을 잘 알고 있다』는 총학생회장을 만났고,동국대학에서는 『김일성 수령 동지께서 남조선 학생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임수경양 집을 찾아간 북한 기자들은 「통일주」를 마시며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과 친애하는 김정일 지도자 동지께서 임양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셨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북한 기자들은 분명히 남북합의각서를 벗어난 행동을 했다. 그러나 같은 언론인의 처지로 조금은 이해가 간다. 우리 기자들도 북한에 가면 그런 충동과 의욕이 솟구치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같은 신문기자로 불쾌한 것은 사실보도나 언론자유엔 근처도 못 가는 주제에 엉뚱하게 서울을 자신들의 충성심 경쟁무대로 삼는 그 어색한 행태들이다. 가소롭고 가련해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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