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 든 이태원, 北김정은까지 뜬 홍대…달라진 핼러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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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 분장하고 왔으면 ‘어그로’(관심) 엄청 끌렸을 걸요.”

 28일 오후 8시 이태원을 찾은 성모(29)씨는 맨 얼굴이었다. 검은색 하의와 하얀 티셔츠에 검정 가죽 재킷으로 옷차림도 평범했다. 원래 그는 핼러윈 데이면 항상 분장을 하고 이태원을 찾았다고 한다. 성씨는 “최소한 분장 정도는 해야 재밌는데 올해는 다들 민감해하니까 눈치 보여서 관뒀다”고 말했다.

 27일 오후 8시쯤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 한가운데에 우측통행을 유도하는 질서유지선이 설치되어 있다. 세계음식문화거리는 지난해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과 이어져있다. 이영근 기자.

27일 오후 8시쯤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 한가운데에 우측통행을 유도하는 질서유지선이 설치되어 있다. 세계음식문화거리는 지난해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과 이어져있다. 이영근 기자.

 핼러윈을 앞둔 주말인 27~28일 오후 취재진이 찾은 이태원은 지난해 참사 여파로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였다. 양일 이태원에서는 핼러윈 분장과 복장(코스튬)을 한 시민들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상인회 차원에서는 ‘잭-오-랜턴’(호박등)과 박쥐 등 핼러윈 장식물을 달지 않고, 관련 이벤트도 자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경찰과 지자체는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오후 6시쯤 참사 현장 인근 세계음식문화거리. 경찰은 길이 300m에 달하는 거리 한가운데 높이 약 1m의 질서유지선(폴리스 라인)을 설치해 우측통행을 유도했다. 2차선 무단횡단을 하는 시민들까지도 호루라기를 불며 붙잡아 계도했다. 현장에서 만난 경찰 관계자는 “인파 밀집뿐 아니라 이상 동기 범죄 낌새가 있는지도 꼼꼼히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중점 관리 지역인 퀴논 길엔 한눈에 보기에도 핼러윈 참가자보다 순찰 중인 경찰과 용산구 공무원이 더 많았다. 27일 오후 9시 퀴논 길에서 야광 머리띠 등 장난감을 팔던 김모(55)씨는 양손으로 X자 모양을 만들며 “완전 땡. 개점휴업”이라고 말했다. 이태원 주민인 김씨는“5년째 핼러윈마다 좌판을 폈는데 이렇게 분위기가 안 나긴 처음”이라며 담뱃불을 붙였다.

27일 오후 9시쯤 이태원 주민 김모(55)씨가 좌판을 펴고 야광 머리띠 등 핼러윈 관련 장난감을 판매하고 있다. 그는 "1시간 동안 1개도 팔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27일 오후 9시쯤 이태원 주민 김모(55)씨가 좌판을 펴고 야광 머리띠 등 핼러윈 관련 장난감을 판매하고 있다. 그는 "1시간 동안 1개도 팔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코스튬 등을 준비해 핼러윈을 기다린 이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신부(新婦) 콘셉트 옷을 입은 고모(23·남)씨는 “일주일 동안 의상을 만들고 분장만 4시간 넘게 했는데 막상 코스튬 참여자가 적어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슈퍼맨 복장을 한 캐나다인 씨에 타오(38)도 “슬픈 때인 건 이해하지만 한국에서 핼러윈을 더는 즐길 수 없을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경찰관 코스튬도 눈에 띄었다. 경찰은 지난해 이태원 참사 당시 경찰복 코스튬 탓에 현장 혼란이 가중됐다고 판단해 집중 단속 중이다. 유사 경찰복을 착용한 채 이태원을 찾은 박모(33·여)씨는 “불법인 줄 몰랐는데 친구가 알려줘서 이제야 알았다”며 택시를 타고 서둘러 이동했다.

참사를 추모하려는 행렬도 줄을 이었다. 핼러윈과 별개로 이태원을 찾은 윤모(24)씨는 “인근 꽃집 국화 물량이 동나서 하얀 꽃을 가져왔다”며 참사 현장에 헌화한 뒤 묵념했다. 상인들도 애도에 동참했다. 세계음식문화거리에 있는 한 가게는 “깊은 마음으로 애도합니다. 10월 27일~31일까지 휴무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를 붙이고 문을 닫았다. 문을 연 일부 가게들도 ‘10·29 별들을 기억합니다’라는 포스터를 가게 입구에 붙여 희생자를 추모했다.

지난 27일 오후 10시쯤 이태원역 삼거리에서 한 경찰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게 애도를 표하는 내용의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이영근 기자

지난 27일 오후 10시쯤 이태원역 삼거리에서 한 경찰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게 애도를 표하는 내용의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이영근 기자

 다만 추모와 축제가 공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매년 핼러윈에 이태원을 찾는 김환(25)씨는 “안전과 추모가 강조되면서 예전보다 무거운 분위기인 건 사실”이라며 “참사로 희생된 분들도 이태원이 우울한 공간으로만 남길 바라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자정 무렵 지하철이 끊기면서 경찰은 질서유지선을 걷어냈다. 클럽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면서 거리는 점차 북적이기 시작했지만, 보행에 지장이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상인들은 자체 순찰을 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었다. 28일 오전 3시 녹사평역 사거리에 설치된 용산 핼러윈데이 현장 상황실. 부상자 현황 등을 알리는 상황실 내 커다란 화이트 보드에는 ‘사고 개요: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핼러윈을 앞둔 28일 오후 11시 홍대의 한 술집 앞에서 코스튬과 분장을 한 이들이 클럽 앞에 줄을 서 있다. 이영근 기자

핼러윈을 앞둔 28일 오후 11시 홍대의 한 술집 앞에서 코스튬과 분장을 한 이들이 클럽 앞에 줄을 서 있다. 이영근 기자

 반면 홍대는 이태원보다 확연히 더 북적였다. 출구 전용으로 운영되는 홍대입구역 9번 출구를 나서기 전부터 경찰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때렸다. 오후 8시쯤까지 비교적 한산했던 홍대 클럽 거리 인근 술집들은 9시가 넘어가자 대기 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술집은 20~30명가량이 줄을 섰고, 클럽 직원들은 밖으로 나와 한쪽 방향으로 줄을 서달라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커, 마녀, 김정은 등 핼러윈 코스튬을 한 이들도 곳곳에 보였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태원에는 27일 오후 10시 기준 1만2000명, 28일 19시 1만4000명이 모였다. 반면 홍대 인근에는 27일 오후 10시 기준 8만명, 28일 19시 기준 9만명으로 상대적으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하지만 특별한 안전 문제가 불거지진 않았다. 인파가 몰리기 시작하자 경찰은 인도 가까이에 있던 질서유지선을 차량이 통제된 차도 쪽으로 이동시키며 통행로를 넓혔다. 홍통거리 인근 골목에 인파가 몰리자 한 경찰이 “더 못 들어간다”고 외치며 인원을 분산하기도 했다. 여기엔 상인들의 협조도 한몫했다. 홍대 인근 46개 노점상은 핼러윈 기간인 27~31일까지 영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홍대 9번 출구 앞 평소 노점상이 즐비한 곳엔 질서유지선이 대신 설치됐다.

시민들은 “사람 반, 경찰 반”이라며 신기해하면서도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게임 캐릭터 코스튬을 한 서모(25)씨는 “이태원 대신 홍대를 찾았는데 안전해 보인다”며 “작년에 이태원도 이렇게 했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28일 11시 기준 홍대에서 핼러윈 관련 부상자는 2명(찰과상, 코피), 이태원은 0명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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