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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과학기술 탈정치화는 한국 도약 위한 필수 조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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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호 35면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특임교수(초대 원장)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특임교수(초대 원장)

2022년 2월에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동북아는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전쟁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꼽혀 왔다. 미국과 중국이 첨단 과학기술의 패권을 놓고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정학적 단층 지대이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CPU, GPU 등 인공지능(AI) 시대 핵심 논리 반도체 글로벌 생산의 3분의 2를 담당하는 인접한 대만을 무력으로 손 안에 넣게 되면 미국의 첨단 전략기술 제제로부터 일순간에 해방될 뿐만 아니라 세계 제1의 패권국가가 되기 위한 시간을 앞당길 수 있다.

반면 미국은 트럼프에 이어 바이든 정부에서도 중국에 대해 일관된 전략적 스탠스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세계 제1의 패권국이 되면 세계가 불행해진다는 인식을 가지고 중국의 서방세계 첨단과학기술과 자본에 대한 접근을 통제해 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만이 중국에 넘어가는 것은 첨단 전략기술로 세계 제1의 패권국가가 되고자 하는 시진핑 주석의 중국몽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전제다.

대만·미국, 탈정치 전략산업 지원
정부가 분야별  예산 배정하는 대신
장기적으로 과학기술기금 조성해
전문가 집단이 불려 나가도록 해야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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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면에서 한국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 대만이 반도체 파운드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현재의 독보적인 위치를 갖게 된 것은 능력 있는 인재에게 리더십을 부여해 오랫동안 일관되게 전략적으로 준비한 결과이다. 대만의 TSMC 창업자 모리스 창 박사는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대만을 세계가 의존하는 반도체 파운드리 국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곤 했다. 스탠퍼드에서 전기공학박사를 받은 반도체 전문가이지만 시대를 앞서 본 안목을 갖춘 인물이다.

대만 정부는 정권에 상관없이 일관되게 파운드리 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정치가 대만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흔든 적이 없다. 올해 초에는 대만 입법부가 TSMC 등이 위치한 신주, 타이난의 세 대학과 타이페이의 대만 국립대에 반도체 전문 대학원을 전략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법을 파격적으로 제정했다. 반도체와 같은 첨단분야 전문대학원이 빠르게 전략적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대학 본부와 독립된 자체의 재정 구조와 학사 운영 규정을 갖출 수 있게 하는 법이다. 이에 따라 TSMC 등 민간 기업들이 전문인력 양성과 연구를 위한 전문대학원의 기금에 자발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TSMC의 CTO를 지낸 고위 임원이 산학의 경계를 넘어 대만 칭화대학의 반도체 전문대학원장으로 취임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묶여 파격적 혁신을 할 수 없는 우리 나라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가의 앞날을 첨단전략과학기술이 결정한다는 것을 현대사가 입증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현재의 정치와 분리된 과학기술 체계의 초석을 놓은 버니바 부시가 있다. MIT 조교수 시절 미국의 군수업체 레이시온을 창업하는 등 현실 문제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던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해 전시 과학기술개발을 총괄하는 OSRD를 세웠다. 부시는 원자탄 개발과 적기의 침투를 조기에 탐지하는 레이더 기술 개발 등 첨단 전략 과학기술에서 미국을 단기간에 세계 최고로 끌어올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발표한 34페이지의 보고서 ‘과학: 그 무한한 프런티어(Science, the Endless Frontier)’는 전후에도 미국이 과학기술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체계를 고민해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연구재단(NSF) 등이 설립됐다. 정치와 무관하게 국가의 전략적 목표를 정하고 과학기술 연구를 추진하는 지침서이다.

세계적 혁신 생태계로 꼽히는 실리콘밸리의 초석을 놓은 스탠퍼드대의 프레드릭 터만 부총장은 부시의 제자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무것도 없던 서부의 스탠퍼드 주변에서 프런티어 정신을 선구적으로 실천했다. NSF 등 미국 정부의 연구비를 끌어와 실용적 연구를 하고 대학 부지에 연구공원을 세워 창업을 장려했다. 850여명의 기술자를 이끌며 그가 당시 사용한 예산이 스탠퍼드대 예산보다 컸다. 터만의 실리콘밸리 프로젝트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미국에서는 아무도 부시와 터만의 관계를 이권 카르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전쟁은 새로운 과학기술을 낳고 새로운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새로운 문명을 가져온다. 세상의 우려와는 달리 우크라이나 이후의 새로운 전쟁은 3주 전 중동에서 갑자기 발발했다. 국제정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때문에 세계가 새로운 변곡점을 맞게 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에 대한 봉쇄에 집중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허를 찔린 것이다. 일론 머스크가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이 심상치 않다. 세계사적 변곡점에서 첨단 과학기술의 경쟁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과학기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본을 탈정치화하지 않고는 국가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매년 행정부가 분야별 예산을 배정하는 대신 장기적으로 분야별 과학기술 발전 기금을 조성해 전문가 집단이 책임지고 불려 나가는 방안을 고민해 볼 때가 되었다. 자유와 책임을 정치가 지배하는 대신 전문가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특임교수(초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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