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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김기현의 용단에 기대 거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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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당의 권력이 바뀔 때마다 빛의 속도로 드러눕는 능력은 국민의힘의 유전자다. 10·11 강서구청장 보선 이전 국민의힘 안팎에선 이철규 사무총장, 박성민 전략기획부총장 등 이른바 ‘신핵관’(신윤핵관)들이 내년 총선 공천의 밑그림을 짜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 소문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신핵관의 위세가 대단했던 건 사실이다. 당직자들은 틈만 나면 사무총장 집무실 앞을 지켜보다가 누가 나타나면 드링크 들고 쫓아가 인사하기 바빴다. 드링크병을 여러 개 들고 뛰어가느라 병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고 한다. ‘딸랑이’란 말이 이렇게 어울리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몸 던져 대선·지선 승리 견인 전력
총선 앞두고 살신성인 결단 절실
“내려오라” 인요한 언급 숙고할 때

요즘 국민의힘 신권력으로 등장한 혁신위원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도 비슷하다. 혁신위에 들어가려고 로비하는 의원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런데 면면을 보면 혁신위원 감이 아니라 ‘혁신 대상’ 감인 이들이 대부분이라 실소가 나온다는 게 출입기자들 얘기다.

당 권력이 바뀔 때마다 거기 붙어 눈도장 찍은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혹여 권력 실세들이 짠 공천 밑그림이 존재한다면 이젠 전면 백지화가 불가피하다. 국민이 요구하는 쇄신의 수준이 워낙 엄중해서다. 지지율이 깡패 아닌가. 공천은 권력 실세가 아니라 민심에 맡겨야 한다. 민심을 대변하는, 확장성 있는 새로운 인물이 공천을 주도하지 않으면 내년 총선은 강서구 보선과 다름없는, 아니 더 못한 성적표를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공천에 대한 사심을 버리라는 말이 가혹하게 들리겠지만 국민의힘이 살길은 그것뿐이다. 위기 수습책으로 출범시킨 혁신위원회가 살길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요구하는 수준의 확실한 공천 물갈이와 새 인재 발탁이 가능한 여건을 조성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전라도를 사랑하는 푸른 눈의 귀화인’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를 위원장에 임명한 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김기현 대표의 책임이 막중하다. 그는 혁신위에 전권을 주겠다고 했지만, 강서구청장 보선 참패에도 임명직들에만 책임을 묻고 사무총장에 영남 출신을 앉힌 사람이 김 대표 아닌가. 혁신위에 전권을 정말 주겠다면 자신의 거취까지 혁신위에 맡기는 결기를 보여야 한다. 마침 인요한 위원장은 “국민의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야 한다”고 했다. 영남권·중진 의원들은 험지 출마하거나 불출마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울산 남구을의 4선 김 대표부터 지역구를 새 피에 넘기고 험지에 몸을 던지는 솔선수범이 절실하다. 요즘 김 대표의 언행에서 이런 결단을 피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다는 얘기가 당 안팎에서 들려오니 다행스럽다. 내친김에 거취도 숙고하면 좋겠다. 늦어도 다음 달 중순이면 대통령실과 내각의 인사 쇄신이 일단락될 것이란 게 여권의 관측이다. 그러면 다음은 당 차례다. 당의 최고 지도자인 김 대표가 살신성인의 용단을 내린다면 정권의 쇄신 의지는 국민에 명백히 각인되고, 공천 물갈이와 인재 영입에 큰 동력이 부여될 것이다.

김 대표는 몸을 던져 당을 살린 전력이 이미 있는 사람이다. 대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지난해 1월 2일.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는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대선 후보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이래선 무난히 진다. 선대위원장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이 요동치면서 “사퇴할 사람은 이준석”이란 여론이 급부상했다. 나흘 만에 이 대표 탄핵을 논의하는 의원총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대표는 대표실에 칩거하며 버텼다. ‘진실의 순간’이 임박한 그 시점 이 대표 방에 홀로 들어간 이가 김기현이었다. 그가 “이제 결판을 내야 합니다”라고 하자 이 대표는 “내가 당을 깨려 하겠느냐. 날 믿어달라”고 했다. 김기현은 “나도 이 대표를 믿는다”고 했다. 이 대표는 “그럼 좋다. 의원총회에 가겠다”고 했다. 때마침 윤석열 후보가 김기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김기현은 “이 대표와 말이 통했다. 그를 품으라”고 했다. 윤 후보는 즉각 국회로 달려와 이 대표와 손을 잡았다. 대선의 최대 악재였던 ‘윤·이 갈등’이 해소된 순간이었다.

이뿐 아니다. 김기현은 원내대표 자리도 스스로 한 달을 단축해 조기 퇴임하는 용단도 내렸다. 대선에 이어 치러진 6·1 지방선거의 순항을 위해 후임자에게 조기 등판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둔 데는 이런 원활한 ‘바통 터치’가 한몫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김기현은 두 번 몸을 던져 두 번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이기는 데 기여했다. 이제 김기현이 세 번째 용단을 내린다면 반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도 여당이 선전하는 촉매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