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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작이라는데 "배고파 귀순"…北 '고난의 행군' 때보다 더 어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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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5일 "서해곡창 황해남도의 농장들에서도 알곡 생산 계획을 성과적으로 수행한 자랑을 안고 결산분배가 연이어 진행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노동신문, 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5일 "서해곡창 황해남도의 농장들에서도 알곡 생산 계획을 성과적으로 수행한 자랑을 안고 결산분배가 연이어 진행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노동신문, 뉴스1

소형 목선을 타고 지난 24일 강원도 속초 인근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 주민 4명이 귀순 이유로 "배고픔"을 호소한 가운데 모순되게도 북한 관영 매체들은 연일 '풍작'을 선전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주장하는 풍작이 사실이라 해도 식량 증가분이 크지 않아 만성적인 식량난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권은 풍년을 자축하지만, 배고픔에 시달리다 탈북하는 주민들은 계속 나올 수 있다.

北, 연일 '풍작' 선전, 곡물값도 안정세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5일 자신들의 최대 곡창지대인 황해남도 지역의 가을걷이 소식을 전하면서 "농장들의 포전(논밭)마다에는 예년에 없는 흐뭇한 작황이 펼쳐졌다"며 "일부 포전에서는 2배 이상의 소출을 거뒀다"고 주장했다.

이는 북한 당국이 지난달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러 당시 러시아 측의 식량 원조 제안을 고사하면서 '올해 상당히 괜찮은 수준의 수확량을 달성했다'고 밝힌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또 북한 입장에선 식량문제 해결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추진한 김정은의 성과를 부각하려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도 북한 지역의 올해 식량 작물 작황이 좋아졌다는 평가를 내놨다. 탈북민 출신인 김혁 한국농어촌공사 농어촌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북한 매체가 공개한 영상에 나온 알곡의 수, 여문 정도 등으로 미뤄볼 때 올해 수확한 벼의 상태가 지난해보다 크게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4일 김덕훈 내각총리가 "농업부문을 비롯해 당이 제시한 올해 목표 점령을 위해 총매진하고 있는 인민경제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료해(점검)했다"라고 보도했다. 노동신문, 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4일 김덕훈 내각총리가 "농업부문을 비롯해 당이 제시한 올해 목표 점령을 위해 총매진하고 있는 인민경제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료해(점검)했다"라고 보도했다. 노동신문, 뉴스1

북한 내 곡물 가격도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북한 전문매체인 아시아프레스에 따르면 북한 내 옥수수 가격은 지난 20일 기준 1㎏당 2550원(북한 화폐 단위 원)으로 올해 들어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 9월 1㎏당 6800원까지 올랐던 쌀 가격도 5700원까지 떨어지면서 일반 주민들이 체감하는 식량 수급 상황도 소폭이나마 좋아졌을 가능성이 있다.

"식량난 해소엔 역부족"

이처럼 봄 가뭄, 여름 홍수, 일조량 부족 등 기상악화로 작황에 타격을 받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 북한 지역의 식량 작물 작황은 예년 수준을 회복할 것이란 관측이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만성적인 식량난을 해소할 수준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정유석 IBK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 주민들이 개인적으로 경작한 곡물이 나오면서 시장 가격이 일시적으로 하락한 것으로 보인다"며 "중국·러시아에서 쌀·밀가루 등을 들여온 것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이 2021년 "식량 형편이 긴장해지고 있다"는 김정은의 언급 이후 집중적으로 식량문제 해결에 매달리고 있지만, 자체적 노력이 아니라 기상여건이나 외국으로부터의 수급 등 외부 요인이 식량 작황에 더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조선중앙TV는 지난 8월 1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오계농장과 월랑농장을 방문해 "태풍에 의한 농작물 피해를 가시기 위한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했다"고 18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캡처, 노동신문

조선중앙TV는 지난 8월 1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오계농장과 월랑농장을 방문해 "태풍에 의한 농작물 피해를 가시기 위한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했다"고 18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캡처, 노동신문

통일부는 북한의 연평균 식량 부족량을 약 80만t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만성적인 식량난은 사회주의 시스템 자체의 한계에서 기인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자영농에 준하는 수준으로 농업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단순 증산을 통한 식량 문제 해결은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더 어려워

실제 북한의 최근 1인당 양곡 공급량은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못 미친다는 분석도 나왔다.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지난 12일에 발표한 '배급과 시장의 충돌'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2020~2022년 북한의 1인당 양곡 공급량이 182㎏으로 급감했는데, 이는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4~1999년 1인당 양곡 공급량인 201㎏을 하회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임 연구위원은 북한에서 물리적·심리적으로 심각한 공급위기가 닥친 원인으로 '배급-시장 병립체제'에서 정부가 일괄 통제하는 '양곡전매제'로 양곡 유통제도를 전환한 것을 지목했다. "북한의 식량 사정은 알려진 것보다 더 나쁠 가능성이 크며, 피해는 주로 저소득층에 집중되고 있을 것"이라면서다.

2020년 10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원도 김화군 수해 복구 현장을 방문해 벼 낟알을 살펴보는 모습. 중앙조선TV 캡처, 연합뉴스

2020년 10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원도 김화군 수해 복구 현장을 방문해 벼 낟알을 살펴보는 모습. 중앙조선TV 캡처, 연합뉴스

북한이 앞으로도 장마당을 배제한 채 곡물의 생산·유통을 직접 통제하는 '신양곡정책'을 토대로 각 지역의 농장에서 생산한 양곡을 계획에 따라 철저히 입도선매한다면 내년 초 춘궁기를 앞두고 또다시 식량 부족 사태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로 정부는 올해 초 북한 일부 지역에서 아사자가 다수 발생한 배경에 대해 "첫 번째로 전년 대비 생산량이 감소했고 두 번째로 북한 당국에서 식량 공급과 유통을 하는 정책으로 변화하는 동향이 나타나 유통 문제의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2023년 2월 21일 통일부 당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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