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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민근의 시선

‘민생 드라이브’에 자제를 당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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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20일 식품산업협회에 16개 주요 업체 대표들이 모였다. 관할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달 8일에 이어 한 달여 만에 다시 ‘소집령’을 내리면서다. 이날 한훈 차관은 참석자들에 “부당한 가격 인상을 자제하고, 경영 효율화로 원가부담을 흡수하는 등 물가안정에 적극 협조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간담회가 끝난 뒤 기자들에 “식품업계 관계자들이 엄중한 상황을 인식하고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말했다”고 결과를 전했다. ‘부당 인상’ ‘엄중 상황’이란 표현에서 이날 회의 분위기는 대충 짐작이 간다.

16개 업체만이 아니다. 전날인 19일에는 대형 마트 업체들도 불려갔다. 주요 외식 프랜차이즈 등에도 관료들이 직접 찾아가 협조 요청을 할 예정이란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이에 질세라 주요 협회 임원들을 불러 ‘공산품 가격 점검 회의’를 열었다.

잇따라 기업 소집해 물가 압박
민생 위한 ‘자제 당부’라지만
기업들 “총선까지 인상말란 얘기”
민생 포장한 포퓰리즘 경계해야

일련의 일들이 벌어지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한 건 22일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정협의회였다. 서울 구청장 재보궐 선거 패배 이후 여권이 ‘민생 드라이브’를 걸겠다며 정례화하기로 한 회의체다. 총리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여당 대표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도 ‘장바구니 물가’가 주요 안건으로 논의됐다. 당정은 “민생 안정을 정책의 최우선에 두고 부담 완화에 총력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생을 외치는 목소리가 잦아졌다는 건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의미다. 봄이 오면 제비가 돌아오고,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듯 말이다. 기업인들도 이를 체감적으로 안다. 한 식품기업 임원은 “정부는 자제를 당부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올리지 말라는 통고”라면서 “최소한 내년 4월 총선 때까지는 참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이 민생을 챙기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까. 국민의 삶을 챙기고 개선하는 건 정치의 기본 사명이자 목표다. 그런데 여기에 ‘드라이브’란 말이 붙으면 의미가 좀 달라진다. 일상적으로 신경 써야 할 주업이 아니라 마치 밀린 숙제하듯, 무슨 작전을 펼치듯 부산을 떨어야 하는 일처럼 돼버린다. 당장 체감되는 성과를 내야 하니 무리수도 잇따른다. 요즘 벌어지는 물가 잡기가 딱 그렇다. 기업 팔 비틀어 라면값, 아이스크림값 억누르는 게 사실상 주요 대책이다. 고(高)물가가 잠시 스쳐 갈 일이라면 그나마 수긍하겠다. 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물론 한국은행도 장기화 가능성을 경고한 상황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경제가 구조적 인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졌다는 경고도 잇따른다. 미·중의 공급망 경쟁, 잇따르는 전쟁 등 탈(脫)세계화가 불러온 역풍이란 얘기다. 이럴 땐 잠깐 눌러놨더라도 스프링처럼 솟구치려는 탄력은 오히려 높아진다. 한 식품업체 관계자도 “원당, 원유 등 원자재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계속 가격 인상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4월 이후엔 너도나도 한꺼번에 올리려 할 텐데 그 후유증을 어떻게 감당하려 할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전기요금 등 꼭 필요한 공공요금 인상도 ‘민생 드라이브’에 묻힐 가능성이 높다. 한전의 천문학적 빚도 줄기는커녕 유가 상승과 함께 더 불어날 공산이 크다.

이런 식의 물가 잡기가 별 효과 없이 폐해만 크다는 건 이미 12년 전 전 국민이 경험한 적이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이른바 ‘MB물가 지수’ 얘기다. 당시 소비자물가가 치솟고 국제유가가 뛰어오르자 정부는 이른바 ‘생활 밀접 품목’ 52개를 꼽아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매주 경제 장관들의 물가대책회의가 열렸고, 각 부처는 품목을 나눠서 가격을 매일 점검하며 밀착 마크했다. 하지만 ‘MB 물가’ 품목의 5년간 상승률은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1.6배에 달했다. MB 자신도 “고유가와 두 차례 세계 경제위기 그리고 자연재해와 구제역 등으로 인한 물가 상승을 정부의 노력만으로 안정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실상 실패한 정책이란 걸 인정한 셈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권이 민생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포퓰리즘성 정책을 감쌀 포장지로 쓰일 위험을 경계하자는 얘기다. 기왕 정례화하기로 한 고위 당정 협의회에서도 참석자들의 무게에 걸맞은 안건을 다뤘으면 한다. 1%대 중반을 향하는 잠재 성장률을 끌어올릴 구조개혁 방안 같은, 시급하지만 어려운 주제 말이다. 배추를 몇 천t 방출하겠다느니 하는 건 부처의 담당 과에 맡겨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정부 권위와 공권력이란 신뢰 자원을 라면값 50원 내리는 데 낭비하는 일도 더는 없었으면 한다. 정부의 표현대로 ‘부디 자제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