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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시와 기쁨의 원천, 야생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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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고진하 시인·목사

고진하 시인·목사

시월에 들어서며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추워져 구들방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엊그제도 장작을 아궁이에 밀어 넣고 따뜻한 기운을 즐기며 불멍을 하고 있는데, 부엌에 있던 아내가 물이 담긴 쌀 바가지를 들고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뚱딴지처럼 말했다.

“당신 쌀 붇는 소리 들어봤어요? 나도 오늘 처음 들었는데, 아주 신기해요.”

나는 아내의 보챔에 쌀 바가지를 들고 귀를 갖다 대 보았으나 쌀 붇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안 들려요…? 안 들려… 아, 아, 들려, 조금씩 들려… 짜글짜글… 뽀글뽀글…. 무려 30년이 넘도록 쌀을 불렸는지만 오늘 처음 들어본다는 그 소리.

 쌀 붇는 소리 최근에 처음 들어
우리 식구 살리는 미세한 소리
새와 곤충 소리 사라지는 오늘
인간의 창조력 쇠퇴할 수밖에…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그 방면의 전문가가 30년 만에 들었다는 소리를, 잠시 집중하는 중에 나도 들을 수 있었다. 마른 쌀이 물을 머금을 때 나는 그 세미한 소리, 우리 식구들 살리는 소리 아닌가. 첫 아이 임신했을 때 아내 뱃속에서 들릴 듯 말 듯 들리던 태동처럼!

나는 쌀 붇는 소리를 듣고 곧 시로 옮겨 적었는데, 시의 후반부는 이렇다. ‘당신 덕분에 내 귀가 호사를 누렸으니 이젠 세상의 모든 큰소리들을 거절하리. 대개 큰소리들은 생명을 죽이는 소리이니! 그리고 큰소리만 잘 듣던 내 귀에 복면을 씌우고, 들릴 듯 말 듯 저 세미한 소리에 징검다리를 놓으리.’

쌀 붇는 세미한 소리를 들은 이후 나는 소리에 더 민감해졌다. 최근에 해만 뜨면 천둥소리처럼 울리는 제트기들 굉음, 자동차들이 달리며 내뿜는 경적과 소음을 들으며 전과 달리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야생의 소리를 훼방하는 인공의 소리들.

그래도 저물녘이 되면 고맙게도 가을의 악사인 귀뚜라미들이 서늘한 노래로 공기에 맛깔스러운 양념을 친다. 또 개울이나 연못에서 먹이 사냥을 하던 청둥오리나 왜가리, 백로 등의 새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제 보금자리를 찾아 떼를 지어 날아갈 때 들리는 날개 젓는 소리. 나는 그 야생의 소리를 들으러 일부러 대문 밖에 나가 서쪽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날이 맥동이 약해지는 내 몸이 생기를 얻곤 하니까.

한데 야생의 소리의 진원인 야생 동물들이 자꾸 줄어드는 것 같아 안쓰럽다. 방죽을 걷다 보면, 개여울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야생 오리나 백로 같은 새들은 주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데, 서식지의 황폐화가 새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 새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저린다.

“세상의 온갖 야생의 소리가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 인류는 음향적 창조성의 정점인 동시에 세상의 풍성한 음향을 부수는 파괴자다.”(데이비드 G 해스컬, 『야생의 치유하는 소리』)

그러니까 동식물의 서식처 파괴와 인공적 소음이 지구상의 소리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 그동안 우리는 환경 문제를 대기의 변화, 화학 물질의 오염, 종의 멸종 같은 현상으로만 표현했지만, 데이비드는 다양한 동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음향적 환경의 파괴를 거론한다. 그러면서 ‘앙상해진 감각 세계’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게 되어 안타깝다고. 야생의 소리가 점차 사라지고 인간이 일으키는 인공적 소음이 다른 생명의 소리들을 짓누른다면 지구는 생기를 잃고 훨씬 단조로워지고 말 것이다.

더 나아가 야생의 소리의 다양성이 사라지면 인간의 창조력도 쇠퇴할 것이다. 그렇다. 시인인 내가 야생의 소리에 자주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것이 ‘기쁨의 원천이요, 생명의 창조성을 들여다보는 거룩한 창문’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야생의 소리와 멀어지며 창조성을 잃어가는 인간들로 진동한동 붐비지만, 나는 흙에서 나고 자라는 식물들과 사귀며 동물들의 생동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시 창작의 희열을 누려왔다. 그러나 지구 생태계가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훼손된다면, 그때도 내가 시적 감각을 유지하고 그 감흥을 노래할 수 있을까.

여름부터 늦가을인 지금까지 우리 집 돌담을 넘나들며 우짖는 조그만 딱새들. 나는 흰빛이 섞인 잿빛 머리의 딱새들이 꼬리를 아래위로 까딱까딱 흔들면서 내는 피리의 고음을 닮은 노랫소리를 좋아한다. 오늘도 아침 창가에 기대어 마당 빨랫줄에 앉아 노래하는 딱새들을 보다가, 아 그래 너희가 우리 곁에서 사라진다면 내가 혼신을 다해 쓰는 시(詩)란 물건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고진하 시인·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