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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화나지만, 하마스도 싫다…'긴장한 구경꾼' 아랍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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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7일(현지시간)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소식이 전해지자 한 쿠웨이트 시민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지지 의사를 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7일(현지시간)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소식이 전해지자 한 쿠웨이트 시민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지지 의사를 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의 무력 충돌이 2주 넘게 이어지는 가운데 인접한 아랍 국가들의 속내도 복잡해지고 있다. 지난 17일 하마스 본거지인 가자지구 내 알아흘리 병원의 폭발 참사로 이들 지역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있지만, 아랍 국가들은 정작 하마스의 지원 요청엔 침묵하고 있다. 이와 관련,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보도에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 못지않게 하마스에 대해서도 뿌리 깊은 불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배경을 짚었다.

일단 알아흘리 병원 참사 소식이 전해진 직후 아랍권 전역에선 분노가 확산 중이다. 이번 참사가 하마스 연계 무장 조직인 ‘이슬라믹 지하드’의 로켓 오발 때문이라는 이스라엘의 해명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을 맹비난 중이다. 요르단 외무부는 “이스라엘이 이 심각한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카타르 외무부도 “잔인한 학살이자 무방비 상태 민간인에 대한 극악무도한 범죄”라고 규탄했다. 안와르 가르가쉬 아랍에미리트(UAE) 대통령실 고문은 X(옛 트위터)를 통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병원 공격으로 인한 무고한 사람들의 비극과 끔찍한 장면”이라고 강조했다. 레바논과 요르단, 이란, 이집트, 리비아, 예멘, 모로코, 이라크, 튀니지, 튀르키예 등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을 규탄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19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 난민캠프에서 시민들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시민들이 아동을 구조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 난민캠프에서 시민들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시민들이 아동을 구조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에도 아랍 국가들은 하마스에 대한 지원에는 일절 난색을 나타내고 있다. 오히려 하마스를 비판하는 기류마저 강하게 드러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의 국영 방송사들은 이스라엘의 봉쇄로 인해 가혹한 상황에 처한 가자지구 시민들의 참상을 취재해 보도하면서도 이 과정에서 하마스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거나 이들의 입장을 담지 않았다. 반면 아랍어를 사용할 줄 아는 이스라엘인은 인터뷰했다. 과거 보도에선 이스라엘군을 지칭할 때 ‘점령군’이란 비판적 의미가 담긴 용어를 썼지만, 이번 전쟁 국면에선 '이스라엘군'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최근 중동 지역에 불어닥친 지정학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단 2개 아랍 국가(이집트·요르단)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이스라엘이 지난 2020년부터 UAE, 바레인, 모로코, 수단 등 4개 아랍 국가와 수교했고, 사우디아라비아도 이스라엘과 수교 협상을 벌여왔다”며 “(사우디·UAE의 보도 태도엔) 이스라엘과 관계 개선을 벌여 온 아랍 국가들의 입장이 반영돼 있다”고 전했다.

팔레스타인 지역과 인접한 아랍 국가들은 하마스에 대해 더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이집트 정부는 가자지구와 이집트 시나이 반도를 연결하는 육로인 ‘라파 통로’의 개방을 철저하게 막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대규모 유입은 물론 하마스 전투원들이 난민 사이에 끼어 이집트로 들어오는 것을 강하게 걱정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친정부 성향의 이집트 방송인 이브라힘 에이사는 최근 하마스를 향해 “당신들을 위해 왜 이집트인 1억 명을 위험에 빠뜨리라는 건가”라고 비판해 이집트 사회에서 큰 공감을 얻었다.

지난 18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시민들이 팔레스타인 깃발을 들고 가자지구 알아흘리 병원 폭발 참사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8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시민들이 팔레스타인 깃발을 들고 가자지구 알아흘리 병원 폭발 참사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또 다른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지구(이스라엘 북동쪽)와 인접한 요르단 역시 하마스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과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19일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팔레스타인 주민을 요르단이나 이집트로 강제 이주시키는 데 대해 반대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내놨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역사적으로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로 출발한 하마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이슬람 과격주의를 내세운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에서 정권을 잡은 적이 있고, 왕정인 요르단 역시 무슬림형제단에 의한 민중혁명을 우려하고 있다. 레바논과 시리아에서도 각각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와 알아사드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하마스와 거리를 두려는 여론이 크다.

하마스와 서방 세력의 교섭 창구 역할을 해온 카타르 역시 입장 변화가 감지된다. 카타르는 2012년 수도 도하에 하마스의 정치 교섭 사무실을 내줬다. 현재도 하마스의 정치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거주하고 있다. 또 카타르는 가자지구 내 시민들의 생활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묵인하에 하마스에 수년간 재정적 지원까지 했다. 이를 통해 하마스의 유일한 대외 협상창구로서 포로 교환 등 물밑 협상에 긴밀히 관여해왔다.

하지만 이번 분쟁에서 카타르의 동맹인 미국이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영국 채텀하우스(왕립 국제문제연구소)의 사남 바킬 중동·북아프리카본부장은 “카타르가 하마스와 연계되는 것을 재평가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를 두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아랍 국가들은 ‘긴장한 구경꾼’"이라며 "겉으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지만, 속으론 가자지구란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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