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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도 전에 팬덤 100만 돌파, BTS식 홍보시스템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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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호 08면

글로벌 K팝 4.0 현지화 넘어 토착화

요즘 가요계에선 벨기에·미국·독일·인도 멤버로 구성된 다국적 걸그룹 블랙스완이 화제다. ‘국내에서 한국어 노래로 활동하는 한국인 없는 K팝 아이돌’이라는 역설 때문이다. 2020년 결성 당시 한국인과 외국인이 고루 섞여 있었지만, 지난해 한국인 멤버가 모두 탈퇴하고 전원 외국인으로 재정비됐다.

그뿐 아니다. 한국에서 영어 노래를 부르는 일본인 7인조 걸그룹 엑스지도 있고, 최근 JYP가 최종 데뷔조로 발표한 6인조 신예 걸그룹 VCHA(비춰)도 미국인 4명·캐나다인 1명·한국계 미국인 1명 구성이다. 미국 대형 음반사 리퍼블릭 레코드와 함께 현지에서 캐스팅한 VCHA는 한국에서 K팝 트레이닝을 받고 내년 정식 데뷔해 북미에서 활동할 예정이다.

글로벌 아이돌 오디션에 12만 명 몰려

‘K팝 연수돌’ 인도네시아 걸그룹 스타비. 최영재 기자

‘K팝 연수돌’ 인도네시아 걸그룹 스타비. 최영재 기자

하이브도 유니버설뮤직 산하 게펜 레코드와 함께 북미 시장 맞춤형 글로벌 오디션 ‘더 데뷔: 드림아카데미’를 진행 중이다. 방탄소년단(BTS)을 탄생시킨 K팝 제작 시스템으로 글로벌 걸그룹을 키운다 하니 전 세계에서 12만 명이 몰렸고, 60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예비 멤버 20명이 지난달부터 대중 앞에 섰다. 미국·브라질·아르헨티나·스위스·벨라루스 등 12개 국적인데, 2명뿐인 한국인이 최종 멤버 6~7인 안에 들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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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없는 K팝 아이돌’이 아직 낯설지만, 아이돌의 원산지 일본은 일찌감치 포맷 수출 형태로 글로벌 비즈니스를 해 왔다. ‘AKB48그룹’을 기른 거물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2010년대 이미 태국의 BNK48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JKT48, 대만 TPE48, 필리핀 MNL48, 인도 MUM48, 중국 SNH48 등 AKB 자매그룹을 아시아 전역에서 제작했다.

그에 비해 K팝의 세계진출은 특정 아티스트 중심으로 한 해외원정의 역사였다. 2000년대 보아처럼 한국 아티스트에게 언어와 문화를 교육시켜 현지용 아티스트로 키우던 1단계와 2010년대 블랙핑크의 리사, 트와이스의 쯔위·사나·모모처럼 외국인 멤버에게 현지에서 K팝 홍보대사 역할을 맡기던 2단계를 거쳐, 2020년대 들어 비로소 ‘한국인 없는 K팝 아이돌’을 제작하는 3.0 시대가 활짝 열렸다.

오는 30일 첫 싱글 앨범 ‘프레스 플레이’로 국내 가요계에 데뷔하는 니쥬가 가장 성공한 모델이라 할만하다. JYP가 2020년 일본 소니뮤직과 손잡고 시작한 ‘니지 프로젝트’를 통해 전원 일본인 멤버로 짠 9인조 걸그룹이 일본에서 이미 맹활약 중이다. 데뷔 전 발매한 디지털 앨범부터 오리콘 차트를 싹쓸이했고, 최근 일본 8개 도시 단독 투어에 18만 5000여 관객을 동원했다. 2019년 한일 공동제작 ‘프로듀스101 재팬’을 통해 결성된 일본인 보이그룹 JO1도 홍백가합전 출전, 교세라돔 콘서트 등 일본 내 입지가 탄탄하다.

K팝 스타들의 주무대도 더 이상 국내가 아니다. 정국·뷔 등 BTS 멤버들의 솔로곡은 빌보드의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고, 블랙핑크는 지난해부터 11개월간 세계 41개 도시 월드투어를 돌았다. 지난해 데뷔한 걸그룹 아이브도 최근 19개국 27개 도시 월드투어를 시작했고, 뉴진스도 곧 월드투어에 나선다고 알려졌다.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9인조 걸그룹 니쥬. [사진 JYP엔터테인먼트]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9인조 걸그룹 니쥬. [사진 JYP엔터테인먼트]

글로벌 음악업계도 K팝에 적극 러브콜을 보낸다. JYP와 하이브의 글로벌 오디션은 세계 3대 메이저 제작사와 협약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업계의 주목 포인트도 성공한 특정 아티스트보다 K팝의 미학과 제작 노하우, 훈련 방식이 응집된 시스템으로 옮겨가고 있다. 한류 연구자인 조영한 한국외대 교수는 “최근 K팝의 흐름은 더 이상 특정 한국인이나 한국회사가 만드는 음악적 장르가 아니라, 퍼포먼스와 패션 등 하나의 컨셉트를 가진 종합 프로젝트로서 기획되어 만들고 유통하고 즐기는 방식으로서 확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K팝의 미학은 솔로보다 그룹이 행하는 힙합과 R&B 요소가 강한 댄스음악이 기본인데, 비주얼 요소가 핵심이다. K팝 댄스 서바이벌 ‘스트릿우먼파이터2’의 인기에서 보듯, 숏폼 챌린지 시대에 노래보다 안무와 퍼포먼스가 더 중시되곤 한다. 스토리텔링이 있는 뮤직비디오, 판타지 웹툰을 뚫고 나온 듯한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 각 그룹 컨셉트에 맞춤형으로 스타일링된 패션도 K팝을 규정하는 요소다.

시스템적으로는 준비된 인재가 아닌 원석을 기획사가 발굴해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아이돌로 육성하는 방식인데, 특히 주목받는 건 홍보 시스템이다. BTS가 소셜미디어를 통한 적극적인 소통으로 팬덤을 키운 방식이 모델이 됐다. 요즘 아이돌은 안무 영상·자체 예능 등 공식 콘텐트의 꾸준한 업데이트는 물론, 트위터·V라이브·1:1 채팅 포맷까지, 끊임없는 노출을 통해 팬을 붙잡는다. 지난 9월 데뷔한 SM 보이그룹 라이즈는 데뷔도 전에 공식 SNS계정 팔로워 100만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글로벌 음악산업 주류 된 K팝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K팝의 이런 요소들은 이제 ‘모듈’화 추세다. 아시아권에서는 2000년대부터 많은 K팝 커버그룹이 나왔지만, 이제 K팝을 통째로 이식하기보다 현지 스타일이 어우러진 토착화 모델이 소위 K팝 4.0시대를 열고 있다. ‘피팝’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운 필리핀 보이그룹 SB19, ‘큐팝’으로 통하는 카자흐스탄 보이그룹 나인티원, ‘K인니팝’의 개척자를 자처하는 인도네시아 걸그룹 ‘스타비’ 등이다.

SB19은 한국 중소 기획사가 필리핀 현지에서 3년간 트레이닝을 거쳐 2018년 데뷔시켰다. 안티가 많은 카피캣 그룹과 달리 필리핀 신화를 곡의 소재로 삼는 등 현지 문화를 적극 끌어안는 한편, 한국 여행 브이로그를 찍는 등 K팝과의 연결고리도 강조한다. 필리핀어와 영어가 섞인 노래를 부르는데, 지난해 ‘Bazinga’란 곡이 빌보드 ‘핫 트렌딩 송즈’ 차트 7주간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인지도도 얻었다.

SB19의 성공 이후 ‘피팝’을 내세우는 그룹이 여럿 등장하고, 다른 동남아 국가에도 유사한 흐름이 생기고 있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3년째 동남아 아이돌을 선발해 K팝 연수를 시켜주는 ‘동반성장 디딤돌 사업’도 현지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이 K팝 모델에 탑승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시장 진출이다. 강력한 소통 플랫폼과 홍보 시스템을 활용해 글로벌 인지도를 단숨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길화 원장

정길화 원장

정길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은 “아시아권 국가들이 한류지수가 높고 팬도 많지만 일방주의·상업주의를 지적받기도 했다”면서 “한류 플랜트 수출을 통해 동반성장 하자는 취지로 우리가 특장점을 가진 트레이닝 시스템을 투입해 교류의 판을 깔아주고 K팝 플러스 현지음악을 만들게 하니 지난해 연수를 받은 태국의 로즈베리는 자국에서 신인가수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엔 ‘어디까지를 K팝으로 봐야 하느냐’는 정체성 논란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음악이란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고, K팝도 서양의 팝음악과 일본 J팝의 강력한 영향 아래 탄생된 장르기에 국적 논란은 무의미하다. 심두보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미국 팝 시장이 커지면서 90년대만 해도 영국 팝이 정체성 위기를 겪었지만 지금은 분명히 차별화된다”면서 “K팝도 혼종화를 통해 진화했지만 누구나 직관적으로 구별할 정도로 정체성이 뚜렷해졌다. 태국에서 블랙핑크 리사가 엄청 영웅시되지만 아무도 태국가수라 부르지 않고 K팝 가수로 인식한다”고 말했다.

피팝·큐팝·K인니팝…K팝 무한진화

현지화를 넘어 토착화에 이른 K팝의 성공은 팝 글로벌리즘의 측면에서 서양 팝문화를 로컬화시키고 글로벌 대중문화의 다양성 확장에 기여하는 면도 있다. 조영한 교수는 “지금 K팝을 둘러싼 글로벌한 현상들은 저들의 일상생활로 확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마치 한국에서 힙합을 여러 형태로 듣는 것처럼 서구에서도 K팝을 만드는 다양한 연행자들이 나오고 문화끼리 서로 교류하는 데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며 “K팝이 세계시장을 정복해 다른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중문화의 헤게모니를 흔들면서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적 측면에서는 성공에 들뜨기보다 현실을 냉정하게 보고 글로벌 메이저 자본에 종속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팝시장이 대자본에 휩쓸려 자칫 글로벌과 리저널(regional), 로컬의 3중 지배 구조가 굳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두보 교수는 “하이브·YG·JYP가 유니버설·소니 등 글로벌 메이저 제작사와 협약 관계를 맺은 것이 쾌거였으나, 템퍼링 의혹이 강한 피프티피프티 사태에 워너뮤직이 배후로 지목되면서 중소기획사의 생존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K팝이 피팝·큐팝 같은 로컬 시장을 아우르는 리저널 시장이 됐지만, 메이저 자본에 종속되면 다양성이 훼손되고 생태계가 파괴될 수도 있다. 정부도 대기업 위주의 정책이 아니라 제작현장의 불공정 관행 등 본질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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