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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마음 허지원의 마음상담소

힘들만하니 힘든 겁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극심한 심적 고통을 호소하는 글, 혹은 인터뷰가 인터넷에 게시되면 어느 순간부터  ‘누칼협?(누가 너에게 그리하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어?의 준말)’이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공무원·전화상담원·의사·개발자·교사·예술가의 불행한 일에, 심지어 재난의 피해자나 유가족에게까지, ‘그러게 누칼협?’이라는 말이 날아와 칼처럼 꽂힙니다. 누가 그일 억지로 하게 했어? 아니잖아. 누가 그 사람에게 거기에 일부러 가게 했어? 아니잖아. 가히 누칼협의 시대입니다.

내가 힘들다는데, 죽음을 생각할 만큼 힘들다는데, ‘너만 힘든 것도 아닌데, 민폐 끼치지 마. 너는 행복한 줄 알아야 해, 적당히 해’ 같은 이야기로 감정을 통제하려 합니다. 심리학 용어로 이를 ‘감정의 비타당화’라 합니다. 내가 엄연히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비난합니다.

우울감 들어도 자책하지 말길
우리의 감정은 옳고 지혜로워
타인의 마음에 ‘칼’ 꽂으면 되나
가만히 함께 있는 것도 큰 위로

[일러스트=김지윤]

[일러스트=김지윤]

오랜 기간 ‘네 감정이 잘못되었다’고 가스라이팅하는 환경에 있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내 감정을 믿기 어렵습니다. 내가 힘들어해도 되는지, 화를 내도 되는지, 잘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인터넷에 익명의 게시글을 올리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맞는지 틀린지’를 감별해달라 부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점차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믿지 못하게 할 것, 실은 그것이 가스라이팅의 제1원칙이지요. 이렇게 네 감정이 틀렸다 말하는 누칼협 정신이 우리 마음을 자꾸 가난하게 합니다. 내가 정신적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에, 감정을 차츰 의식의 바깥으로 밀어 넣는 편을 택합니다. 감정표현불능증의 출현입니다.

감정표현불능증은 열 명 중 한 명에서 나타납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이든 분노든,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순간순간 다정하게 눈치채주지를 못합니다. 저희 연구실에서도 연구를 통해 확인했던 바인데, 감정표현불능증이 있는 분은 외부 자극에 쉽게 불안정해집니다. 이 와중에 타인의 감정은 잘 읽습니다. 공감능력마저 높습니다. 그러니 자기감정을 돌아보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실제로 많은 우울한 분은 자신이 지금 우울해 해도 되는지를 곱씹습니다.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가짜로 우울해 하는 것은 아닌지를 반복 검증합니다. ‘객관적으로 보건, 다른 사람들하고 비교하건, 제가 사실은 우울해 하면 안 되거든요. 저보다 힘든 사람도 많은데요.’ 그때 제 대답은 늘 같습니다. ‘그게 우울의 증상이고요!’

물론 감정 표출 방식에는 맞고 틀린 것이 있습니다.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예의를 갖추지 않는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자기감정의 모습을 눈여겨보아달라는 부탁입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 중에 틀린 감정이란 없습니다. 힘들만 하니까 힘든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날만 하니까 화나는 겁니다. 나의 감정에 대해 ‘감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도 ‘감히!’라고 답하세요.

내가 선택한 길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우울할 자격이 박탈되는 것이 아니며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우울해 해도 됩니다. 지나치게 열심히 살아서 우울도 오는 겁니다. 설사 곁에서 누칼협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도, 그건 그 사람이 택한 삶입니다. 내 감정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입니다. 내가 알아주지 않는 감정은 결국 이자까지 쳐서 마음의 증상뿐 아니라 몸의 증상까지 데리고 귀환할 것이므로, 다정하고 강한 마음으로 자기감정을 옹호하고 타당화해야 합니다. 이렇게 느껴도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구나. 살아도 되는구나.

비타당화하는 습관을 가진 분에게도 한마디 덧붙입니다.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어 결국 누칼협을 말하는 자신의 뇌에도 틀을 만듭니다. 언젠가 삶이 필연적인 고통을 가져올 때, 나만큼은 나를 지켜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습니다. 냉소적인 말만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우울과 무력감, 불안감으로 휘청일 때, 그때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해 주세요. 적립식통장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강하고 다정한 말이 오래도록 통장에 남습니다. 고통받는 누군가의 마음을 지금 당장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그냥 가만히 그 곁에 서 주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위로가 됩니다.

나아가지도, 정박하지도 못한 채로 잔물결에도 쉽게 일렁대던 감정은 알아봐 주는 것만으로도 다시 제 이름을 찾고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잠시 그렇게 쉬어 가다가, 우리는 언젠가 적당히 좋은 때를 맞아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타당화하고 타당화받은 모든 감정과 지켜선 마음이, 결국 그 사람과 나를 매일 살게 하고 우리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 데려다 놓을 것입니다. 모든 감정은 옳고 지혜롭습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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