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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위기정신과 운명 건 투자, 현재도 통하는 성공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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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건희 선대회장 3주기(10월 25일)를 앞두고 18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선대회장의 신경영 발언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건희 선대회장 3주기(10월 25일)를 앞두고 18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선대회장의 신경영 발언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가 언제까지 변해야 할 거냐. 영원히 변해야 한다. 안 변하면 일류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일대 혁신을 주문했던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맞아 세계 석학이 선대회장의 리더십과 경영철학을 집중적으로 재조명했다. 18일 한국경영학회는 삼성글로벌리서치의 후원으로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건희 선대회장은 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수백 명의 임원을 모아놓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 불리는 신경영 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삼성은 반도체와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날 학술회에는 김재구 한국경영학회장,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국내외 석학과 삼성 관계사 임직원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석학은 30년 전 한국의 한 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건희 선대회장의 독특한 리더십과 경영 방식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건희 회장 같은 리더는 드물었다”

로저 마틴 캐나다 토론토대 명예교수는 “40년 넘게 수많은 경영자에게 컨설팅을 해왔는데 이건희 회장 같은 리더는 드물었다”며 “그는 상상력과 통찰력을 가진 ‘통합적 사상가’였다”고 평가했다. 통합적 사상가의 특징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각각 우수한 요소를 포함한 새로운 형태로 창의적인 해결책을 만든다는 점이다.

마틴 교수는 “통상 리더는 과거의 데이터를 근거로 미래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이 선대회장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과거 데이터도 없는 상황에서 가능성과 상상을 바탕으로 전략적 미래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 교수도 이 선대회장을 “단순히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가나 대기업 리더가 아닌 자선가로서의 면모를 가진 ‘르네상스인’”이라고 표현했다. 과거 피렌체의 메디치가(家)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끌었듯 문화·예술·과학·의료·복지·체육 등 사회 전반의 분야에 공헌하며 경영 외에도 한국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의미다.

1994년 2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조명한 미국의 주간지 ‘비즈니스위크’ 표지. [뉴시스]

1994년 2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조명한 미국의 주간지 ‘비즈니스위크’ 표지. [뉴시스]

다른 석학도 ‘이건희 신경영’의 본질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혁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리타 맥그래스 컬럼비아대 경영대 교수는 “30년 전 신경영은 ▶영원한 위기정신 ▶운명을 건 투자 ▶신속하고 두려움 없는 실험 등 현재의 성공 전략과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수립됐다”고 말했다. 스콧 스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대 교수 역시 “오늘날 경제·지정학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 선대회장의 ‘가능성을 넘어선 창조’는 삼성과 한국이 미래로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특히 재계와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삼성이 앞으로도 일류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느냐’하는 주제였다.

마틴 교수는 ‘삼성 직원의 몰입도’ 문제를 꼬집었다. 그는 갤럽 통계를 예로 들며 “오늘날 대기업 직원의 17%는 회사의 목표를 회피하고 51%는 관심이 없으며, 32%만 조직에 몰입하고 있다”며 “회사는 큰데 직원은 자신이 부품처럼 작게 느끼지 않도록 사회·타인·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별도의 인터뷰에서 “큰 기업은 돈과 자원이 많아 뭐든 할 수 있겠지만, 삼성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할 수 있다고 해서 아마존이나 알파벳(구글 모기업)처럼 너무 많은 분야에 진출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변화가 아니라 안정이 이상한 것”

이 선대회장이 평생 그랬듯 위기의식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맥그래스 교수는 “지속가능한 경쟁우위란 없다는 것, 변화가 이상한 게 아니라 안정이 이상한 것이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른 기업보다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면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로 정보가 투명하게 제공되게 하는 등 보고의 굴레에서 탈피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며 ‘속도’를 강조했다.

하지만 신경영 30주년을 맞아 그간 1등을 지켰던 삼성의 인재관리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업무 환경과 시대 변화에 발맞춰 인사의 새로운 역할을 고민할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 신경영 시대의 대표적 산물이 지역 전문가 제도다. ‘S급 핵심인재’란 개념도 신경영 선언을 계기로 처음 등장했다. S급 인재는 최고경영자보다 더 높은 연봉과 대우를 받으면서 핵심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최근 삼성 내부에서는 조직의 덩치가 커지면서 그룹 계열사나 사업부(삼성전자) 단위로 임직원에게 일률적인 보상을 하는 구조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국내 대기업 대부분이 맞닥뜨린 역(逆)피라미드 인력 구조의 함정 역시 피해갈 수 없는 과제로 꼽힌다.

김효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삼성 신경영 선언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 경쟁력’이라는 메시지”라며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문화와 관행을 되돌아볼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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