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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외교 vs 실리외교 충돌?…국제적 가치 지키는 게 '실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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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홍태화 국제관계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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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가치외교와 실리외교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가치외교와 실리외교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언제부터 가치외교와 실리외교의 충돌이 논란이 되고 있다. 대체 가치외교란 무엇일까. 가치는 뜬구름 잡는 명분이나 슬로건이 아니다. 삶의 양식, 도덕적 규범, 공동체의 정체성을 내포한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 합의된 이데올로기만 ‘가치’가 아니다. 법에 기반한 국제질서, 주권 평등주의가 적용되는 국제체제가 우리 국민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준다. 가치외교란 이러한 체제를 위협으로부터 수호하는 방법이다.

가치와 실리 나누는 외교 불가능 #한국의 번영 가져온 질서가 가치 #보편 인권과 주권 평등은 지켜야

물론 가치외교 대신 ‘실리외교’를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에 지리적으로 둘러싸여 있고, 자원이 나지 않아 국제무역에 의존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중국, 러시아 등의 이웃들을 쉽사리 적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미중 경쟁 속에서 서방이 속도 조절에 들어갔으니, 한국이 반중전선의 선봉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디커플링 대신 디리스킹을 추구한다는 유럽연합(EU)의 입장 등이 이를 보여준다.

물론 중국과의 불필요한 충돌은 자제해야 한다. 국제무대에서는 서방과 입장을 함께하되 중국과의 양자회담에서는 수위를 조절하여 상대방이 유연하게 나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방법도 있다. 한미동맹이라는 지렛대를 바탕으로 중국과 당당하면서도 허심탄회한 외교를 펼쳐야 한다.

하지만 중국의 야심은 변함없다. 중국은 궁극적으로 지역 패권과 국제 리더십을 추구한다. 물질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역사적 성취감을 위해 중국 중심의 국제 시스템을 ‘마땅히’ 바로 세우고자 한다. 사이버전, 경제전, 미디어 침투 등을 포함한 다양한 수단이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활용된다. 이른바 한계가 없는 ‘초한전(超限戰)’이다. 미국은 이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의 역할 확대를 요청하고 있다. 미국과 서방의 전술적인 강약 조절만 보고 판세가 변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가치와 국익의 정면충돌이라는 관점은 ‘신뢰가치사슬’, ‘프렌드쇼어링’, ‘칩4’ 등 가치를 중점으로 재편되고 있는 공급망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개념들은 미국과 서방의 정부와 기업들이 실리적으로 설계한 이니셔티브들이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공급망에서 부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도를 무기화하며 시장논리를 왜곡하는 일부 권위주의 국가들에 대응하기 위한 극약처방이다. 어긋난 가치가 실리 대신 손해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이해한 것이다. 가치와 실리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형국이다.

사실 미중 경쟁 그 자체가 지정학적 경쟁이자 동시에 가치 경쟁이다. 중국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래 중국식 발전모델에 자신감이 붙었다. 이제는 소위 ‘베이징 컨센서스’를 개발도상국들에 전파해 세계 무대에서 서방의 자유주의적 가치에 도전하려 한다. G7이 주도하는 글로벌 인프라·투자 파트너쉽(PGII)과 중국의 일대일로는 순수 경제분야를 넘어 거버넌스 경쟁, 즉 가치를 둔 충돌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마라톤 이니셔티브 연구소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상충하는 강대국 간의 경쟁은 늘상 있었지만, 탈냉전 시대 미국의 외교는 예외적으로 도덕적 기준 그 자체를 경쟁의 목적으로 봐 왔다”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만 가치와 실리를 엄격히 구분하겠다는 입장은 비현실적이다.

가치외교를 거부하는 이들은 지나친 대미 의존을 경계한다. 그러나 가치외교는 한미동맹에만 올인하는 대신 일본·호주·유럽과의 전략적 소통을 통해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길이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의 안보 연계’라는 국제 정치 트렌드를 주시해야 한다. 양면전선 독트린(Two War Doctrine)을 포기한 워싱턴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대만 수호 중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다. 많은 미국 동맹들은 미국을 국제무대에 엮어두기 위해, 워싱턴의 입장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나토의 첫 아시아 연락사무소가 일본에 설치될 예정이다. 일본은 영국, 호주와 상호접근협정을 맺어 군사협력을 강화했다. 미국의 동맹들이 범 대륙적, 범분야적인 상호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최근 몇 년간 영국과 일본의 전략가들은 ‘대서양 안보와 인도-태평양 안보의 불가분성’이라는 개념을 역설해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4년 주창한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 개념과 달리, 인종과 문화권 대신 가치를 매개로 한 구상이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바이든(오른쪽)과 시진핑. [AFP=연합뉴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바이든(오른쪽)과 시진핑. [AFP=연합뉴스]

사실 미국의 아시아 동맹과 유럽 동맹이 미국의 한정된 자원을 서로 얻어내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대만의 외교관들은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생존이 대만의 생존이라고 주장한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오늘의 우크라이나가 내일의 동아시아가 될 수 있다”며 미국의 계속된 우크라이나 지원을 촉구한다.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국제적 가치가 실리도 지켜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보편적 인권, 항행의 자유, 주권 평등주의 등의 가치는 자연 상태의 조건이 아니다. 수립된 지 몇 세기 안 된 서구적 개념을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수혜를 받아왔을 뿐이다. 인구 5000만 명의 분단국가가 세계적 경제대국, 소프트파워 강국으로 번영하는 지금의 국제 질서는 역사적 기준에서 이례적인 것을 넘어 예외적이다. 가치 외교는 이런 체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실현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실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홍태화 국제관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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