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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오름 20㎞ 뛰다 걷다…3시간10분 아름다운 레이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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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제주 트레일러닝대회 도전기

2023 트랜스제주 20㎞ 참가자들이 억새가 흐드러지게 핀 따라비오름을 달리고 있다. 정영재 기자, [사진 서귀포시]

2023 트랜스제주 20㎞ 참가자들이 억새가 흐드러지게 핀 따라비오름을 달리고 있다. 정영재 기자, [사진 서귀포시]

10월 7일 토요일 오전 10시 정각. 가시리마을 부녀회 풍물패의 신명나는 가락을 뒤로 하고 선수들이 출발점을 뛰쳐나갔다. 함성을 지르며, 머리 위 떠 있는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들며…. 2023 제주국제트레일러닝대회 20㎞ 레이스가 시작됐다.

트레일러닝(Trail Running)은 마라톤과 등산의 장점을 합친 신개념 달리기다. 포장도로만 달리는 마라톤과 달리 산·들·계곡·사막 등 자연 그대로의 길을 달리는 친환경 스포츠로 각광 받고 있다.

초반 1.5㎞ 정도 평평한 포장도로를 지나고 흙길이 시작됐다. 돌멩이를 밟고 말똥을 피하며 달렸다. 산길로 접어들면서 병목 구간이 나타났다. 산길은 한두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데 많은 사람이 몰리다 보니 멈춰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올림픽대로 차량 정체구간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호흡 조절이 쉽지 않았다.

병목 구간을 지나자 울창한 숲길이 이어졌다. 컴컴한 숲속을 지나고, 작은 터널도 통과하고, 통나무로 빗장을 걸어놓은 문도 타 넘어가야 했다. 군대 시절 산악 구보나 유격 훈련을 하던 생각도 나면서 마치 내가 특수 임무를 띤 레인저스가 된 기분이었다.

문제는 페이스 조절이 안 된다는 것. 혼자 한강변을 뛰며 연습할 땐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가자’였는데, 기분이 업 되고 일본·중국 아줌마들한테 자꾸 추월을 당하다 보니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마을 부녀회서 말아준 국수 ‘꿀맛’

50·100㎞ 코스를 달리고 있는 선수들. 정영재 기자, [사진 서귀포시]

50·100㎞ 코스를 달리고 있는 선수들. 정영재 기자, [사진 서귀포시]

지난 8월 초 제주에서 세계 4대 사막마라톤을 완주한 안병식씨를 인터뷰했다. 그는 고향 제주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2016년 제주국제트레일러닝대회를 창설했다. 50·100㎞는 한라산을 뛰지만, 초보자를 위한 10·20㎞는 자신의 고향인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마을의 조랑말체험공원과 오름 두 개를 뛰는 코스라고 했다.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에 “대회 신청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8월 하순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장거리는 젬병이었고, 군대 시절 이후 5㎞ 이상 뛰어본 적도 없었다. 집 근처 한강변을 걷다 뛰다 했다. 처음엔 500m 뛰기도 힘들었는데 점점 거리가 늘어났다. 한강대교에서 반포대교까지 갔다 오기도 하고(왕복 9㎞), 한강대교~여의도~양화대교(왕복 12㎞)를 찍고 오기도 했다. 속도보다는 쉬지 않고 달리는 데 초점을 뒀다. 뛰다가 힘들면 고개를 숙이고 1m 앞만 보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뛰다 보면 온갖 잡생각이 올라온다. 더 뛰다 보면 사라진다. 다 뛰고 나면 기분이 좋다. 자신감도 생긴다.

주말에는 관악산에 올랐다. 서울대 공대 앞 등산로 입구에서 관악산 정상의 음료수·빙과 파는 아저씨 좌판까지, 처음에는 다섯 번 쉬고 1시간 30분 걸렸다. 네 번째 오를 때는 한 번만 쉬고 1시간 10분에 주파했다. 한 달 만에 체중이 5㎏ 줄었다.

대회 일주일을 앞두고 20㎞에 도전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몇 차례 걷는 것 빼고는 계속 뛰었다. 2시간 45분 걸렸다. 20㎞ 커트라인이 4시간이니 망신은 당하지 않겠다 싶었다.

따라비오름(해발 342m)을 앞두고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다. 관악산에서 익숙했던 나무 데크 계단을 쉼 없이 올랐다.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위가 달랐다. 보통 뛸 때는 허벅지 쪽이 아픈데 지금은 종아리와 발목 근육이 아프다. 안병식씨가 해준 얘기가 생각났다. “트레일러닝과 마라톤은 쓰는 근육이 다릅니다. 산을 많이 오르세요.”

앞 사람 뒤꿈치만 보며 하염없이 오르다보니 어느새 따라비오름 정상이다. 일망무제로 펼쳐진 제주의 산과 들, 느릿느릿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산들바람 따라 춤추는 억새의 향연…. 사람들이 일제히 휴대폰 카메라로 풍광을 담는다. 심지어 기념사진, 단체사진을 찍는 팀도 있다. 기록도, 순위도 잊은 듯했다. 지금 우리는 선수인가 등산객인가.

정상을 내려와 달리다 보니 ‘여성 참가자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반은 넘지 싶었다. 잠깐. 내가 출발할 때 맨 뒷줄에 있었잖아. 레이스 내내 추월만 당했고. 그렇다면 잘 뛰는 남자들은 벌써 앞서 갔고, 맨 뒤에서 여자들하고만 뛰는 것 아닌가…. 난 누구? 여긴 어디?

진한 우정 잔치, 내년 2시간대 도전

20㎞ 완주 기념 돌하르방을 받은 정영재 기자. 정영재 기자, [사진 서귀포시]

20㎞ 완주 기념 돌하르방을 받은 정영재 기자. 정영재 기자, [사진 서귀포시]

저 멀리 CP(체크포인트)가 보인다. 참가자들이 잠시 쉬면서 음료수와 간식을 공급받는 곳이다. 이 대회는 일회용품을 버리다가 적발되면 페널티를 받는다. 각자 컵을 준비해 음료수를 받아 마신다. 음료수를 따라 주는 자원봉사자에게 물었다.

“여기 몇 킬로 지점이에요?”

“7킬로요.”

“예? 아, 네.”

아니, 그렇게 달려왔는데 3분의 1밖에 안 왔다고? 다리가 후들거렸다.(나중에 알고 보니 7㎞ 왔다는 게 아니라 7㎞ 남았다는 뜻이었다.)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다리가 아프고 힘이 빠져서 더 이상 뛰기가 어렵다.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빨리 걷다가 조금씩 뛰다가 했다. 앞에 절뚝이며 걸어가는 남자가 있다. 괜찮냐고 했더니 무릎이 갑자기 아프다고 했다. 천천히 오시라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

레이스 후반 최대 고비인 큰사슴이오름(해발 474m)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산악 구간이 끝나고 평지가 나타난다. 이젠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3㎞는 한강변을 뛰던 느낌으로 달렸다. 저 멀리 결승점이 보인다. 200m쯤 남기고 미친 듯이 전력질주를 해 10여명을 제쳤다.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 지도 모르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결승점을 통과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해냈다.’

대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식 기록은 3시간 10분 58초. 순위? 중요하지 않다. 내가 골인한 뒤에도 꽤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는 건 확실하다.

대회 본부에서 완주 기념 돌하르방을 받았다. 가시리 부녀회에서 따끈한 국수를 말아 주셨다. 와우, 꿀맛! 화장실에서 땀과 비에 젖은 러닝복을 벗고 흰색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셔틀버스에 올랐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오후 4시. 서귀포월드컵경기장 앞에 내리니 새벽 6시에 출발한 50㎞ 출전자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열 시간을 달린 선수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생생한 발걸음에 환한 웃음으로 결승점을 통과하는지….

오늘이 59번째 생일이다. 내년엔 한 갑자 도는 기념으로 50㎞에 도전해 볼까? 아니다. 일단 20㎞를 2시간대에 끊는 걸 목표로 다시 시작하자. 하다 보면 50㎞, 100㎞ 가는 날도 오지 않겠나.

43개국서 3300명 출전 작년의 두 배, 절반이 외국인

트랜스제주 100㎞ 출전자들이 출발 신호가 울리자 달려나가고 있다. [사진 서귀포시]

트랜스제주 100㎞ 출전자들이 출발 신호가 울리자 달려나가고 있다. [사진 서귀포시]

2023 제주국제트레일러닝대회는 43개국에서 3300명이 출전했다. 참가자가 지난해보다 갑절이나 늘었다. 외국인이 절반 가까이 된다.

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트랜스제주 by UTMB’다. UTMB(Ultra-Trail du Mont-Blanc)는 제1회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프랑스 샤모니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트레일 울트라 마라톤 대회다. 2003년 시작된 UTMB는 알프스 몽블랑 산맥으로 연결된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의 19개 도시를 지나는 171㎞ 레이스다. 전 세계 트레일 러너들의 ‘버킷 리스트’이다 보니 참가 자격도 까다롭다. UTMB가 공인하는 36개 대회(월드시리즈)에 참가해 러닝스톤을 획득해야 한다. 러닝스톤을 가진 신청자를 대상으로 추첨을 해 UTMB 출전권을 준다. 올해부터 트랜스제주가 월드시리즈 자격을 얻게 됐다. UTMB 출전을 노리는 러너들이 대거 참가해 외국인이 지난해 200명에서 1590명으로 8배나 늘었다.

트랜스제주가 월드시리즈에 들어갔다고 해서 규모가 커진 것만은 아니다. 동호인이 뛰는 10·20㎞ 참가자도 크게 늘었다. 특히 중국·일본·홍콩과 태국·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와 함께 뛴 네 명의 태국 여성들도 “제주의 아름다운 가을을 느끼면서 달리는 코스가 너무나 좋아요. 내년에 또 올 겁니다”라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100㎞와 50㎞ 코스 우승은 남녀 모두 중국 선수들이 휩쓸었다. 100㎞는 타오 루오(9시간 18분 10초), 50㎞는 리싱징(4시간 27분 8초) 선수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 대회는 서귀포시가 주최하고 가시리마을회가 주관했다. 순위 경쟁보다 함께 달리며 완주를 격려하고 축하하는 축제였다. 이종우 서귀포시장은 “트랜스제주가 제주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세계적인 대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 세심하게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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