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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올인의 귀재” 이 남자가 창업하는 법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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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All in): 가지고 있던 돈을 한판에 전부 검. 한 가지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음.」

인생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올인을 세 번이나 한 남자가 있다. 남다른 통찰력과 배짱으로 기업가치 17조원의 물류 유니콘을 탄생시킨 저우성푸(周勝馥·Chow Shing Yuk, 1977~)의 이야기다.

홍콩의 물류 유니콘 기업 훠라라(貨拉拉·Lalamove) 창업자 저우성푸. 사진 란차이징

홍콩의 물류 유니콘 기업 훠라라(貨拉拉·Lalamove) 창업자 저우성푸. 사진 란차이징

1977년, 중국 광둥(廣東)성 지에양(揭陽)시에서 태어난 저우는 3살 때 부모님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했다. 저우 가족은 개발이 덜 된 홍콩 신제(新界) 지역에 터를 잡고, 나무로 지은 허름한 임시 집에서 생활했다. 어렵고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저우는 성공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 강했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맨손으로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은 공부뿐이었다.

1995년, 저우는 그 당시 홍콩 대입시험이던 ‘홍콩 중등교육검정시험(HKCEE)’에서 10과목 A에 도전했다. 대개는 6~8과목 응시에 그치는데, 저우는 10과목 고득점에 도전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내겠다고 일기장에 적었다. 그리고 다짐대로 10과목 모두에서 최고 등급인 A를 받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HKCEE 10과목 A는 한국의 수능 전 과목 1등급보다 훨씬 어려운 것으로, 교육 불모지였던 신제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당시 양질의 교육자원은 홍콩 섬과 주룽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홍콩 중등교육검정시험(HKCEE)’ 10과목 A를 받아 현지 신문에 난 저우성푸. 사진 차오샹

‘홍콩 중등교육검정시험(HKCEE)’ 10과목 A를 받아 현지 신문에 난 저우성푸. 사진 차오샹

현지 신문을 장식한, 개천의 용이 된 저우는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세계 최고 명문대학인 스탠퍼드 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리학이 적성에 안 맞는 것을 깨닫고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전과 후 우등생으로 등극한 저우는 졸업도 전에 세계 3대 컨설팅회사인 베인앤드컴퍼니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하여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연봉 100만 위안을 받으며 컨설턴트로 일했다. 사회 초년생임에도 그의 연봉은 당시 중국인 평균의 100배 이상이었다. *2000년 중국 성진(城鎮) 평균 연봉은 9371위안이었다.

공부에 올인한 저우는 미국 명문대 학위와 거액의 연봉을 거머쥐며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올인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첫 번째 올인

컨설턴트로 일하는 동안 저우는 우연히 텍사스 홀덤 포커를 접하게 됐다. 확률과 전략, 심리전의 결정체인 텍사스 홀덤은 반복적이고 건조한 일상을 살아가던 저우를 한순간에 매료시켰다.

순전히 운에 의존하는 바카라와 달리, 텍사스 홀덤에는 운과 기술이 모두 필요합니다. 짧게 보면 운에 따라 승부가 갈리는 듯하나, 멀리 보면 장기를 두듯 계산에 밝아야 돈을 딸 수 있습니다. 

저우는 3년간의 컨설턴트 커리어를 접고 7년간 프로 포커선수로 생활했다. 사진 차오샹

저우는 3년간의 컨설턴트 커리어를 접고 7년간 프로 포커선수로 생활했다. 사진 차오샹

저우는 자신이 아마도 그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텍사스 홀덤을 열심히 친 사람이었을 거라고 회상했다. 매일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온종일 텍사스 홀덤을 쳤으니 말이다.

2002년, 저우는 첫 번째 올인을 거행한다. 회사를 관두고 마카오에서 전업 포커 선수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과감한 결단과 별개로 프로의 세계는 냉정했다. 저우의 초반 열정과 실력은 비례하지 않았고, 전향 후 몇 년간은 컨설턴트로 번 돈을 까먹기 바빴다.

그런데도 저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게임에서 플레이된 수백 만장의 카드를 치밀하고 집요하게 분석하고, 자신만의 필승법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저우의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2009년까지 3000만 홍콩달러(약 50억원)를 게임 상금으로 손에 넣게 된다.

포커 선수로서 성공의 기쁨도 잠시, 저우는 곧 엄청난 허무감에 빠졌다. 이제 텍사스 홀덤은 그에게 더는 새로운 도전이 아니었고, 카지노에서의 삶은 그를 점차 피폐하게 만들었다. 결국 저우는 7년간 드나들던 카지노를 뒤로하고, 2009년 말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간 딴 돈으로 두 번째 올인을 시도했다.

두 번째 올인

저우가 귀국했을 때 홍콩의 부동산업은 침체에 빠져있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홍콩의 부동산에도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많은 자산이 헐값에 내다 팔리고 있었기에 계약금 10%만으로 부동산을 매입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가치만 있다면 올인합니다. (只要有價值,都值得all in)

이때 저우의 ‘올인’ 정신이 또 한 번 작동한다. 그는 현재의 위기가 다시 곧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제가 회복하면 홍콩의 부동산 시장이 빠르게 정상화될 것이라고 전망했기 때문이다. 저우는 텍사스 홀덤으로 딴 상금 전부로 홍콩에서 부동산 12채를 매입했다. 3000만 홍콩달러로 10배의 레버리지를 일으켜 3억 홍콩달러 어치 부동산을 사들였다.

저우의 과감한 베팅은 이번에도 통했다. 몇 년 후 홍콩의 부동산 시장은 저우의 예상대로 정상 궤도로 돌아왔으며, 더 나아가서는 가격이 폭등해 그에게 엄청난 시세차익을 안겨줬다. *홍콩의 부동산 가격은 2012년 이후 연간 상승률이 10%에 육박했다.

홍콩. 사진 셔터스톡

홍콩. 사진 셔터스톡

촉망받는 컨설턴트로 남들보다 100배 많은 연봉을 받아보고, 화려한 카지노에서 수십억의 상금을 벌어보고, 부동산 투자 성공으로 또 한 번 엄청난 부를 축적해본 저우. 그런 그가 깨달은 점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은 그저 그런 부의 이전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는 제 은행 계좌에 단순히 0을 추가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에 가치를 더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두 번의 올인을 성공시킨 저우는 마지막으로 진정한 의미를 갖는 올인을 해보기로 한다. 자신과 타인을 위해 전에 없던 혁신적인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다음 목표는 세상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창업’이 되었다.

세 번째 올인 

창업의 본질은 도박과 다름없습니다. 기왕 도박할 바에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합니다. 

당시 홍콩에서 창업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업계는 금융과 부동산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던 저우는 그 분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일명 빵차(面包車, 봉고차·용달차)시장에 관심을 가졌다.

빵차 시장은 사실 엄청 큽니다. 중국에만 무려 2000만 대의 빵차가 있지요. 그런데 이들은 매우 비효율적으로 운영 되고 있습니다. 빵차 운전사들은 하루에 보통 한두 건의 용달을 처리하고, 오랜 시간 차 안에서 쪽잠을 자며 다음 주문을 기다리죠.

사진 소후

사진 소후

공유 경제가 막 태동하던 시기, 우버(Uber) 같은 승차 공유 서비스에서 영감을 얻은 저우는 화주와 화물차 운송업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앞서 매입한 부동산 10채를 베팅칩 삼아 2013년 이지밴(EasyVan)을 창업한 것이다.

이후 이지밴은 훠라라(貨拉拉·Lalamove)로 이름을 바꿔 중화권(중국 본토·홍콩·대만)은 물론 동남아(싱가포르·말레이시아·필리핀·베트남), 중남미(멕시코·브라질)에서도 활약하는 물류 유니콘 기업으로 거듭났다. 훠라라는 오토바이, 밴, 소형트럭, 대형화물차 등 다양한 차종으로 이사, 화물 운송, 퀵 서비스 등 맞춤형 물류 솔루션을 제공한다.

사진 라라무브

사진 라라무브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프로스트 앤드 설리번에 따르면, 지난해 훠라라는 4억 2800만 건의 주문을 처리하고 67억 1500만 달러(약 8조 7617억원)의 총 거래액(GTV, Gross Transaction Value)을 달성했다. GTV 기준, 훠라라의 2023년 상반기 세계 시장 점유율은 43.5%로 2위인 우버 프레이트(Uber Freight)보다 3.5배 높다. 2022년 시리즈 G 라운드 투자로 2억3000만 달러(약 3105억원)를 모은 훠라라는 130억 달러(약 17조 5487억원)의 기업가치를 평가받기도 했다.

훠라라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베팅이었습니다.

올인의 귀재 저우는 훗날 인터뷰에서 훠라라의 탄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권가영 차이나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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