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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의 시선

놀라운 건 '9600억 기부'만이 아니다…주윤발 '리얼 영웅본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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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영원한 다거(大哥·큰형님)'로 불리는 홍콩 영화배우 저우룬파(周潤發·68). 지난 4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서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을 계기로 2009년 이후 14년 만에 그가 방한했다. 특별전 '주윤발의 영웅본색(英雄本色)'에서 신작 코미디 가족 영화 '원 모어 찬스'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웅본색'(1986년)과 ‘와호장룡(臥虎藏龍)’(2000년)이 상영돼 팬들의 추억을 소환했다.

 오랜만에 성사된 저우룬파의 방한 자체도 뉴스였지만, 기자회견 발언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홍콩과 중국에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파문이 일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젊은 시절 누아르 영화로 유명해진 세계적 스타 배우 차원을 넘어 용기 있는 지성인의 풍모를 여실히 보여줬다.

홍콩이 배출한 세계적 영화배우 저우룬파(68)가 지난 5일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14년만에 방한한 그는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9600억원의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속해 무소유의 삶이 홍콩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는 이번에 자유의 소중함을 역설해 주목받았다. 송봉근 기자

홍콩이 배출한 세계적 영화배우 저우룬파(68)가 지난 5일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14년만에 방한한 그는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9600억원의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속해 무소유의 삶이 홍콩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는 이번에 자유의 소중함을 역설해 주목받았다. 송봉근 기자

 그가 던진 첫 화두는 무소유(無所有)다. 56억 홍콩달러(약 9600억원)를 기부하기로 약속한 배경을 묻자 "내가 아니라 아내가 기부했다. 그래서 정확히 얼마를 기부했는지 모른다"며 재치 있게 농담을 던졌다. 부인 천후이롄(陳薈蓮·64)은 싱가포르 화교 대기업의 딸이다.

세계적 영화 스타 검소한 인생관
홍콩의 자유 옹호한 지성인 풍모
한국사회 어두운 면 비춰준 '거울'

 저우룬파는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안 갖고 왔기 때문에 갈 때도 아무것도 안 가져가도 상관없다”면서 "하루에 밥 두 그릇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불교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 가르침을 언급한 것이다. 홍콩 바닷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8세에 데뷔해 50년간 스타로 군림했지만, 평소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재래시장에서 생필품을 구매할 정도로 검소한 모습을 보여줘 존경을 받아왔다.

1986년 개봉 당시 큰 화제가 됐던 저우룬파 주연의 홍콩 누아르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네이버 영화]

1986년 개봉 당시 큰 화제가 됐던 저우룬파 주연의 홍콩 누아르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네이버 영화]

 공교롭게 지난 6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대법원장 후보자가 재산 문제로 35년 만에 임명 동의가 부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누구보다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여줘야 할 사법부 최고 수장 후보가 가족 재산 문제로 낙마한 것은 참담한 사건이다. 대법원장 공백 사태와 재판 지연 등 후유증이 우려된다니 저우룬파의 무소유와 비교하는 것조차 민망할 따름이다.
 저우룬파가 일깨워준 또 다른 가치는 자유였다. 기자회견에서 홍콩영화의 황금기를 잇는 한국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자 “한국영화의 가장 큰 경쟁력은 자유다. 소재가 넓고 창작의 자유가 높다"고 평가했다. 홍콩영화의 침체 이유에 대해서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중국의 검열 요구가 많다. 영화를 만들려면 여러 부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도 "홍콩 영화감독들은 몹시 어렵지만 '홍콩 정신'이 살아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2020년 중국의 '홍콩 보안법' 도입 강행으로 자유가 억눌린 현실을 말하던 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이 대목에서는 중국어(광둥어)가 아닌 영어로 답변해 눈길을 끌었다. 홍콩의 부자유함을 폭로한 그의 휘발성 높은 이 발언은 전 세계로 타전됐지만, 중국에서는 곧바로 차단되고 삭제됐다.

세계적 영화배우 저우룬파(68)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홍콩 당국의 영화 검열을 언급할 때 표정이 어두워졌고, 이 대목에서 중국어(광둥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송봉근 기자

세계적 영화배우 저우룬파(68)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홍콩 당국의 영화 검열을 언급할 때 표정이 어두워졌고, 이 대목에서 중국어(광둥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송봉근 기자

 사실 저우룬파는 민주화 투사가 아니지만, 그동안 홍콩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옹호하는 언행을 일관되게 보여줬다. 2014년 '우산 혁명' 당시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지지해 중국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2019년에는 시위대의 마스크 착용을 금지한 '복면금지법' 발표 첫날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서 조깅해 저항 의지를 보여줬다. 시진핑 주석 찬양과 친중 목소리로 당국의 환심을 산 덕분인지 많은 중국 영화에 출연해 돈방석에 오른 또래 홍콩 배우 청룽(成龍·69)과는 처신이 달라도 매우 달랐다.
 자유는 공기와 같아서 충분히 누릴 때는 소중함을 잘 모르지만, 자유가 일순간 사라지면 숨을 쉴 수 없어 머잖아 질식한다. "사실 한국에서도 자유가 때때로 위협받는다"고 저우룬파에게 귓속말을 해주고 싶다. 전체주의 국가들이 이웃한 데다, 한국사회 내부에도 그들과 동조하는 세력이 적지 않아서다. 봉건적 세습 정권의 인권 탄압으로 신음하는 북한 동포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기는커녕 마치 지령을 수행하듯 속전속결로 '대북전단 금지법'을 만들어 '김여정 하명법'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번 가을 저우룬파의 짧은 방한은 그가 주연한 로맨스 영화 '가을날의 동화'(1987년) 같은 아스라한 여운을 남겼다. 7년째 마라톤을 뛴다는 그는 부산에서 자유로운 아침 바다 공기를 마시며 달렸다. 다음 달 19일 홍콩에서 열리는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여할 것이라 했다. 그와 홍콩인들이 '새장'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길 바란다. 저우룬파가 생전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아 그를 응원하는 팬들과 반갑게 해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저우 다거(周大哥), 짜이젠(再見·안녕)!"

코로나19 감염과 사망설까지 돌았던 홍콩 스타 저우룬파(68)가 지난 7월 한 무대에 등장해 팬들과 셀카를 찍고 있다. 홍콩의 민주와 자유를 지지해온 그는 홍콩 홍콩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웨이보 캡처]

코로나19 감염과 사망설까지 돌았던 홍콩 스타 저우룬파(68)가 지난 7월 한 무대에 등장해 팬들과 셀카를 찍고 있다. 홍콩의 민주와 자유를 지지해온 그는 홍콩 홍콩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웨이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