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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메달 따고도 죄인처럼 선 그 선수…병역은 형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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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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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은 신성한 의무인가. 아니면 형벌인가. 항저우 아시안게임 롤러스케이트 남자 계주 결승전에서 세리머니를 하다 0.01초 차로 금메달을 놓친 정철원 선수를 보며 든 생각이다. 은메달을 목에 건 그는 죄인처럼 시상대에 서 있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자괴감과 동료에게 돌아갈 병역 혜택이 자신 때문에 날아갔다는 죄책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후자에 집중하며 그를 손가락질했다. 마치 아시안게임의 최종 목표가 군 면제인 듯 말이다.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나서 감사합니다” 아시안게임 e스포츠 ‘리그 오브 레전드(LoL)’에서 금메달을 딴 정지훈 선수의 말이다. “군대에 가게 된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는 질문에 그는 “군대에 가는 분들이 존경스럽다”며 이같이 말했다. LoL 국가대표 6명은 전승 우승을 일궜다. 그들은 기초군사훈련 3주와 봉사활동 544시간 이수로 군 복무를 대신한다. 단 8개 나라만 본선에 참여한, 심지어 일본은 실업팀 선수만 나온 대회에서 우승한 야구대표팀도 병역 혜택을 받는다. 그중엔 부상으로 한 경기도 뛰지 않은 선수가 있다.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시대를 잘 타고났다”는 말 외엔 설명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롤러스케이트 계주 결승선에서 대만 주자에게 추월당한 정철원 선수(오른쪽). [연합뉴스]

항저우 아시안게임 롤러스케이트 계주 결승선에서 대만 주자에게 추월당한 정철원 선수(오른쪽). [연합뉴스]

‘제복 입은 영웅이 존경받는 사회’. 윤석열 대통령이 보훈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강조하는 말이다. 그에 걸맞게 정부는 군인과 경찰, 소방관, 참전용사 등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다. 건전 재정을 신성시하면서도 ‘병사 월급 200만원’은 임기 내 반드시 실현하겠단 입장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병역은 신성한 의무라기보다 형벌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금메달의 대가로 영웅이 될 기회를 박탈하는 ‘혜택’을 준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이지 않은가.

병역특례제도는 1973년 박정희 정부 때 ‘국가 이익’을 이유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후로 무엇이 국익이며, 국위 선양인지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았다. 지난해 정치인들은 빌보드차트 1위 등 방탄소년단(BTS)의 성과를 병역특례 기준에 추가하려 했다. 병력 부족을 호소하는 국방부의 신중 검토 의견과 불공정 논란까지 더해지며 없던 일이 됐다. 수많은 병역 면제자가 쏟아져나오는 아시안게임을 보니, BTS가 다소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서울의 한 카페에서 육군 말년 병장이 주문한 음료에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문구를 적은 알바생이 화제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까지 고마움을 표하며 찾아 나섰다. 이처럼 국방의 의무를 신성시하는 나라가 정말 맞는다면, 병역특례제도 역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구석진 군부대 곳곳에서 묵묵히 나라를 지키는 청년이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났다”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시대는 끝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