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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분만 과실로 뇌성마비…서른 넘게 살아야 배상금 마저 받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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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청사. 뉴스1

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청사. 뉴스1

유도분만 과정에서 뇌손상을 입고 태어나 영구장애를 갖게 된 8세 아동에게,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살아있다면’ 그 이후부터 매월 배상금을 나눠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17부(부장판사 홍동기‧차문호‧오영준)는 지난달 17일 의료진이 약 6억 2000만원을 배상하고, 원고가 30.5세가 넘는 2046년부터는 월 271만원씩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약 16억원을 한번에 지급하라고 판결했었다.

유도분만 중 태아 스트레스, 태변흡입

신생아실에 늘어선 신생아 침대 사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연합뉴스

신생아실에 늘어선 신생아 침대 사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연합뉴스

A군은 2015년 한 산부인과 전문병원에서 태어났다. A군의 어머니는 오전 8시에 유도분만을 위해 입원했고, 약 4시간 진통 끝에 A군을 낳았다. 11시 59분에 태어난 A군은 출생 직후 온 몸에 태변(태아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뱃속에서 싼 변)이 묻어있었고, 호흡이 없었다. 의료진은 즉시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12시 25분에 A군을 큰 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다.

그러나 A군은 목숨은 지켰지만 뱃속에서부터 태변을 흡입해 생긴 장시간의 호흡곤란, 산소부족으로 돌이킬 수 없는 뇌손상을 입었다. A군의 부모님은 2018년 산부인과 의사와 병원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진통 중에 태아 상태가 나빠진 걸 감지하지 못해 빨리 A군을 뱃속에서 꺼내지 못했고, 태어난 뒤 응급조치도 미흡했다는 책임을 물은 것이다.

영구적 지적장애·사지마비 판정을 받은 A군은 소송을 시작했던 2살 때에도 사지마비 상태에 옹알이 밖에 하지 못했고, 현재 여덟살이지만 주변의 도움이 없으면 움직이지도 대소변을 처리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A군 부모님은 기존에 쓴 진료비 및 57.5세(기대여명)까지의 치료비, 간호‧간병에 필요한 개호비, 휠체어 등 보조구 비용, 일실수입 및 위자료를 합해 26억 8000만원을 청구했다.

영구장애, 1심 “15억 9000만원 배상”

의료진의 과실을 인정한 건 1·2심이 같았다. 유도분만을 시작한 뒤에 뱃속 아기의 상태를 보면서, 필요한 경우 응급 제왕절개로 출산 방법을 바꾸는 등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마냥 아기가 분만될 때까지 기다린 점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A군에게 저산소성 뇌손상이 생겼고, 그로 인해 뇌성마비가 생겼다고 인정했다.

1심은 의사 2명이 A군에게 총 약 15억 9058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유도분만이 상당히 진행된 상황에서 태아가 태변을 흡입해 호흡과 맥박 등이 불안정해지는 상황(‘태아 곤란증’)을 진단하기는 쉽지 않고, 출산 직후 응급조치 등에 중대한 과실이 없다는 점을 들어 병원 측의 책임을 60%로 제한했다. 그러나 2심은 의료진의 책임 범위를 30%로 줄였다. 중간에 A군이 처한 상황을 제때 감지하고 ‘응급 제왕절개로 바꾸자’라는 결정을 내렸더라도 A군이 태어난 시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란 분석에서다. 통상 수술을 결정하고 준비해, 제왕절개술을 시행하기까지 1시간이 걸리는 점이 반영됐다.

2심 “6.2억원 + 30세 넘으면 월 271만원씩”

2심에서 더 크게 달라진 건 배상액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재판부는 “약 6억 2000만원을 A군에게 일단 배상하고, 향후 2046년 1월 1일 이후 A군이 생존한 경우 월 271만원씩을 매 달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뇌성마비 환자의 기대여명은 추후 합병증 예방·치료, 현대의학의 발달, 가족들의 열의 등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생존조건부 배상 판결의 이유로 들었다. A군의 수명 예측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이같이 ‘미래에 매달 얼마씩 지급하라’는 판결은 흔치 않다. 의료진 측은 “기대여명이 30세 남짓”이라고 주장하면서 “1심에서 정한 약 60세까지의 배상금을 지급했다가 혹시 A군이 일찍 사망할 경우 되돌려받을 방법이 없다”고 항변했고 그 취지가 상당히 반영됐다. A군이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고 재판부가 판단한 ‘약30세’까지의 배상금은 모두 곧장 지급하고, 생존 가능성에 대해 양측 의견이 다르고 불확실한 미래의 기간에 대해선 “생존할 경우 지급하라”고 결정한 것이다.

병원장 파산하면, 미래에 배상받을 수 있을까

A군 측은 “정기금 판결 제도가 있는 것은 맞지만, 잘 이용되지 않는 형태일 뿐만 아니라, 원고 입장에선 ‘나중에 저 병원이 망하거나 해서 지급을 못 받게 되면 어떡하지’ 등 여러 불안함이 있다”며 아쉬운 반응을 보였다. 의료문제를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변) 등은 실제로 A군 측의 우려와 같은 사례를 최근 논의하기도 했다.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조정중재원이 확정 손해배상금을 대불해주는 제도가 있지만, 여러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A군 측을 대리한 법무법인 히포크라테스 박호균 대표변호사는 “미래의 정기금 지급 판결을 받았더라도, 상대방이 회생절차에 들어가거나 모두 사망할 경우 미래에 강제집행이 어려울 수 있다”고 짚었다. 박 변호사는 “정기금은 강제집행 대상이 아닌 데다, 확정 시점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 현재의 제도로는 대불을 청구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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