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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영화 ‘오펜하이머’와 원폭 순간의 바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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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유니버설 픽처스]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유니버설 픽처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서 한판의 바둑이 떠올랐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1945년 8월의 그날, 히로시마(廣島)에서는 본인방전 도전기가 열리고 있었다. 하시모토 우타로 9단이 타이틀 보유자, 도전자는 이와모토 가오루 9단이었다. 당시 패망이 임박한 일본에서 바둑계도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도쿄의 일본기원이 공습으로 불타버리는 바람에 대국 때마다 이리저리 보따리를 싸 들고 돌아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본인방전은 일본 최대 기전이었고 최고의 이벤트였기에 일본기원도 이 시합만은 멈출 수 없었다.

7월 말 히로시마에서의 1국은 이와모토가 이겼다. 2국 역시 히로시마에서 열리기로 되어있었는데 천우신조였는지 히로시마 교외의 이츠가이치(五日市)로 변경되었다. 바둑은 사흘이 걸렸다. 8월 4일과 5일 연속 대국한 뒤 마지막 날인 6일 아침 8시15분, 다시 대국이 시작되려 할 때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의 관전기는 이렇게 썼다.

“돌연 귀를 째는 폭음과 함께 사방이 마그네슘을 땐듯한 연기와 광선에 휩싸였다. 하시모토 9단은 어느새 뜰에 나가 엎드려 있었다. 원자폭탄이라고 하는 무서운 폭탄이 히로시마를 강타한 것이다.”

아무도 원자폭탄이 무언지 몰랐으므로 대국자나 관계자들도 그저 크게 놀랐을 뿐 대국을 중단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가슴을 진정한 뒤 대국을 재개했고 하시모토 본인방이 5집을 이겼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일본에서도 상영될지 궁금하다. 상영된다면 바둑계의 꽤 많은 인사들이 이 바둑을 떠올릴 것이다. 원폭 하의 바둑은 희극 같기도 하고 비극 같기도 하다. 비행기에서 핵폭탄이 투하되는 절체절명의 순간, 저 아래 환하게 불빛이 반짝이는 작은 집이 하나 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태평스럽게 바둑을 둔다. 우화 같고 비현실적인 퍼포먼스 같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고 역사의 한 장면이다. 운이 좋았다. 모두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는데 대국장이 바뀌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바둑은 전쟁을 모방한 게임이다. 심오한 전략이 바둑의 자랑이다. 동시에 바둑은 전쟁터의 가장 먼 곳에 존재한다. 장원의 깊숙한 대국장이나 사찰, 산속의 정자 같은 곳이 바둑과 어울린다. ‘장막 안에서 천 리를 내다본다’는 표현도 그래서 나왔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바둑을 두고 있다면 이 그림은 너무 이상하다. 비현실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이다. 역사는 보통 사람들을 그렇게 내몬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감독은 덮어두었던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핵폭탄에 얽힌 많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꺼내 들려준다.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조종하고 제어하고 시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이 만든 역사의 홍수에 그냥 떠내려가는 사람들 얘기는 끝이 없으리라. 그중에 원폭 하의 바둑 얘기도 있다.

1950년 6월 서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조남철 선생의 주도로 한국 최초의 승단대회가 열렸는데 그 대회가 전쟁이 시작된 지 이틀이 지난 27일까지 이어졌다. 대국장에 포성이 들려왔다. 하나 전국에서 어렵게 모인 노국수들은 대회를 계속했다.

“해방 후 바둑판과 기원 간판을 짊어지고 서울 바닥을 헤맨 지 어언 5년째, 멀리서 포성은 은은했지만 노국수들과 나는 이 뜻깊은 시합을 중단하고 싶지 않았다.” 생전 조남철 9단의 술회다.

조남철은 6개월 뒤 군에 입대했고 가슴에 총상을 입고 후송된다. 그는 허기와 수면 부족으로 산야를 헤매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한다.

“바둑에서 대국자는 지휘관인데 진짜 전쟁에서는 바둑돌 하나에 불과하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데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 주인공인 오펜하이머조차 역사의 바둑돌 하나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어떤 연유일까.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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